단 세 식구가 서울, 경남, 광주에 흩어져 살고 있는 우리가족은 모처럼 서로 만날 수 있는 날이면 게릴라들이 만난 것처럼 반가우면서도 또 떠날 채비로 늘 바쁘다.
셋 중에서도 이런 저런 자잘한 것들을 챙겨주어야 하는 필자는 그 중에서도 가장 바쁘다. 노부모님을 뵈는 일은 어버이날에나 챙기는 그야말로 년중행사요 이벤트다. 가정의 달이라는 5월, 직장을 가진 중년여성인 내게 가족은 무엇인가? 부모역할, 자식 역할, 아내역할, 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며 가끔 한 숨 짓는 내게 가족은 천국과 같은 안식처일리 만무하다. 그렇다고 지옥도 아니다.
과연 다른 식구들은 가족을 어떻게 경험할까?. 자신의 노후의 삶을 한번도 생각해보지도 못한 채 전 생애를 자식에게 바쳐온 지금세대의 노부모님은 그 어느 때보다 장년이 된 자식들로부터의 보호와 보살핌이 필요한데 젊은 자식들은 야속하기만 하다.
청소년기의 자녀들은 냉혹한 교육의 현장에서 성공하기 위해 유년시절 못지 않게 부모의 지원과 보호를 절실히 필요하다. 이른 바 바깥일(?)로 바쁜 남편도 모처럼 집에 돌아오면 전투에서 돌아온 전사처럼 늘 지친 모습이다.
가족사회학의 이론을 언급할 필요도 없이 산업사회에서 가장 이상적이고 기능적인 가족은 직장 일을 하지 않는 전업주부를 가진 핵가족이다. 가정 밖의 냉혹한 생존의 전쟁터에서 가족성원들이 성공할 수 있도록 물질적, 심리적 보호를 맡은 누군가가 가정을 지켜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그 역할을 하면서 가정을 천국으로 여기며 사는 여성들이 얼마나 될까?
청소년기에 남성들과 똑같이 사회적인 자아실현에 대한 꿈을 키워온 여성들은 대부분 출산이후 심한 좌절과 갈등을 경험하게 된다. 여자가 집 밖에서 뭘 한다고 하더라도 자식교육 실패하면, 가정이 실패하면 무슨 소용이냐고, 차라리 집 안에서 자식 잘 기르는 게 오히려 남는 일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극심한 좌절과 갈등 속에서 대부분의 한국여성이 택하는 실리적인 선택은 자녀 양육기에 일단 일을 포기하는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한국여성의 연령별 취업경력이 전형적인 M자 곡선 모양을 나타내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여성들은 20대 후반에 직장생활에 뛰어들었다가 출산과 자녀양육을 맡아야 하는 30대 중반을 전후하여 노동시장에서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자녀양육이 어느 정도 끝난 40대 후반이나 50대에 다시 일자리를 갖고자 하지만 이들에게 주어진 것은 비정규직, 파트타임의 저임금 직종 밖에 다른 길이 없다. 아이들이 컸다고 하나 기본적인 가사일이 여전히 자신의 몫으로 남아있고 일터에서는 저임금으로 단순노동의 궂은 일을 맡아야 하는 악순환을 반복하면서 자식들 교육비를 한 푼이라도 벌기 위해 버텨야 하는 것이 가정을 가진 대부분의 서민 중년여성의 처지이다.
며칠 전에도 병원에 입원해 있는 남편을 보살피러 간사이 어린 자식 둘이 불에 타죽은 사건이 발생했다. 아이이든, 노인이든, 환자이든 , 장애자든 사회성원들이 누군가의 보호를 필요로 할 때, 우리 사회는 그것을 1차적으로 가족에게 떠넘긴다. 우리 사회에 뿌리깊은 고정관념 두 가지는 개인이 어려울 때 책임을 져야하는 것은 가족이라는 생각, 또, 가정에서 보호의 역할을 해야하는 것은 아내나 어머니라는 이름의 여성이라는 생각이다.
갈수록 맞벌이 부부 가족이 늘어가고 있고 기혼여성의 취업은 돌이킬 수 없는 추세이다. 그런데도 아이양육이나 노부모 보호를 전적으로 가족의 책임으로 떠넘기고, 더구나 그러한 보호노동을 여성 고유의 책임으로 떠미는 생각은 시대착오적이다.
노인 혼자 혹은 노부부만으로 된 노인단독세대는 1981년 69%에서 1998년 20여년 사이에 19.8%에서 41.7%로 현저히 늘어났다. 더구나 60세 이상 노인의 43%가 홀로 된 노인들이다. 보호해줄 자식들이 가까이에 없는 것이다.
인구학자들은 2000년 현재 74.9세인 평균수명은 20년 후인 2020년에는 78세에 이른다고 예측하고 있고, 이미 전체 인구의 7%를 초과한 노인인구는 2022년에는 14.3%로, 2030년에는 20%에 육박하여 말 그대로 초고령 사회가 된다고 전망하고 있다.
아동 양육, 노인 보호를 비롯하여 사회성원을 보살피는 일을
이제 더 이상 가족에게만 떠밀어서는 안된다. 빈곤층 가족에게는 특히 사회적 보호가 절실히 요구된다. 기혼여성들, 아니 장년기의 성인남녀들이 일과
가정을 양립시킬 수 있도록 전면적인 가족복지 정책이 실시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새로운 가족'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 될 것이다.
/안진(광주신학대 사회복지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