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내일]언어의 오용(誤用)
[오늘과내일]언어의 오용(誤用)
  • 시민의소리
  • 승인 2003.05.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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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준[언론인. 전 언론노련 사무처장]

백인백색(百人百色)

올해 초부터 시작된 '문화수도' 소동이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5. 18 강연에서 그 표현을 슬그머니 내려놓은 것이다. '문화관광부장관이 부담을 느낀다'는 우회적인 표현을 쓰긴 했지만, 정작 본인이 부담을 느끼고 있음을 부인하긴 어려울 것이다. 더 분명히 하고자 함이었을까. 이창동 문화관광부장관은 최근 광주지역 방송사 보도국장들에게 더 이상 '문화수도'란 말을 쓰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

광주를 문화수도로 만들겠다는 노무현 후보의 공약은 정치적 수사로는 꽤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상징적 의미로 해석되어야 할 '문화수도'가, 행정수도 이전과 맞물려 실체적인 언어로 이해되면서 엄청난 혼선에 빠졌다.

문화수도 육성론자들이 백인백색(百人百色), 문화수도에 대한 나름의 정의를 내놓은 것이다. 처음엔 문화수도가 문화행정의 중심지여야 한다더니, 나중엔 각종 문화의 발신지라는 정의가 나왔다. 또 수도는 교섭의 중심지라고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개념에 대한 정의가 다르다 보니 문화수도를 만드는 방안도 제 각각이었다. 문화관광부를 옮겨와야 한다는 주장, 세계적인 축제를 벌여야 한다는 주장, 문화재단을 만드는 게 급하다는 주장. 심지어 문화산업을 광주의 차세대 발전전략산업으로 삼겠다는 실현 가능성 없는 주장도 나왔다.

언어란 기본적으로 의사소통을 위한 수단이다. 그런데 모두가 각자 다른 정의로 이해한다면, 이미 언어로서 제 역할을 상실한다. 말이 갈리면 생각이 갈리고, 생각이 갈리면 행동의 통일을 이룰 수 없다. 지난 3개월 동안 광주를 휩쓴 문화수도 소동은, 정확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실감 있게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문화수도라는 용어를 계속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대통령이나 장관이 말을 바꾸었다고 해서, 우리까지 바꾸는 건 옳지 않다고 말한다. 그리고 심지어는 대통령과 중앙정부를 계속 설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고집하는 '문화수도'가 대통령 후보의 연설내용을 비판 없이 받아들여 생긴 것임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 같다.

침소봉대(針小棒大)

최근 문화수도만큼이나 '호남소외'라는 용어도 이 지역을 흔들었다. 호남소외론은 지난 4.24보궐선거에 영향을 미쳤을 만큼 여파가 대단했다고 한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과장된 감이 없지 않다.

군사정권시절 이미 익숙한 단어이기 때문이었을까. 검찰이나 행자부의 일부 인사에 문제가 있다하더라도, '소외'라는 표현은 아무래도 지나치다. 소외의 사전적 의미는 주위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상황이 전라도를 제외한 다른 지역 모두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던 군사정권시절과 비교될 수 있단 말인가. 침소봉대(針小棒大). 그 배경에 정치적 이해가 깔려 있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의도적인 곡해(曲解)

사회적 용어의 혼선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법규정을 그릇되게 해석하는 것이다. 광주시는 지난 2월 '부순 돌이 자재이긴 하지만 기자재는 아니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내놓았다. 불량자재를 사용한 업체의 처벌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기자재는 기재와 자재를 합한 말이라고 국어사전에 분명하게 나와 있다. 그런데도 부실시공업체를 비호하기 위해 잘못된 해석을 고집한 것이다.

법조항의 잘못된 해석은 단순히 행정기관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지난 5월 13일 서구청 도시계획위원회는 광주신세계백화점 1층의 업종변경을 심의하면서 '피혁과 의류판매점이 매점과 유사하다'고 해석했다. 대학교수와 고위공무원 지방자치의원 등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한 짓이다. 그들은 '매점'이란 말을 '물건을 파는 모든 매장'으로 확대 해석한 신세계백화점 측의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국어사전에는 매ː점(賣店)[명사] (호텔·빌딩·역·학교·회사 등에서) 일상 용품을 파는 소규모의 가게라고 정의되어 있다. 용어를 해석하면서 사전 한번 찾지 않았을까?

이 결정 뒤 터미널 부지인 신세계 백화점 1층에는, 루이뷔똥 매장이 들어섰다. 가방 하나 가격이 근로자 한달 봉급과 맞먹는 세계 최고급 브랜드이다. 서구청 도시계획위원들이 아직도 이 것이 매점과 유사한 시설이라고 믿고 있는지 궁금하다.

언어는 기본적으로 커뮤니케이션 수단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하는 말을 상대가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 언어의 의미를 왜곡하는 사람들. 그 뒤에 숨겨진 의도를 다시 한번 챙겨보게 하는 5월이다.

/정병준(언론인. 전 언론노련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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