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오늘]역사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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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민의소리
  • 승인 2003.05.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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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철[호남학진흥원 전문위원. 광산중 교감]

올해도 어김없이 영변의 약산은 진달래꽃으로 붉게 물들어 있을 것이다. 한라에서 백두까지 산간 양지 바른 곳이면 어디서나 흔하게 눈에 띄는 꽃이다. 참꽃 또는 두견화라고도 불리며, 식물학상 철쭉과로 분류되는데 그 종류만 해도 자그마치 37종이나 된다고 한다.

어린 시절 뒷동산에 올라 꽃잎을 따먹던 기억이 남아 있다. 달보드레하던가. 입안으로 가득히 번지던 그 향긋함이라니! 농촌의 구수한 맛 가운데 하나는 이맘때쯤 꽃잎을 따다가 짓는 화전이다. 풍류와 격조가 담겨 삶의 향기가 물씬거린다. 궁중에서는 진달래 화채로 상감의 구미를 돋우기도 했다.

두견화가 詩人의 붓끝에 올려진 지는 천여년 전으로 거슬러 오른다. 고려초 최승로가 왕명을 받들어 백엽두견화(百葉杜鵑花)에 대하여 읊은 것이 효시다. 시문학을 통해 민족정서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아마도 소월 이후가 아닌가 싶다. '금잔디', '산유화', '엄마야 누나야' 등 그는 주옥같은 시편들로 일제 강점기 민중의 정서를 대변하였다. 그런데 북핵문제가 불거지면서 '영변의 약산/ 진달래꽃'이 자꾸만 마음에 걸려 밤잠을 설치게 한다.

영변약산 진달래와 북핵

독수리가 병아리를 채가듯 아프가니스탄을 통째로 삼키고 이라크를 덮친 화염이 동아시아 쪽으로 아가리를 벌리고 있기 때문이다. 北韓이 힘겨운 외교전을 앞에 두고 '8천여개 폐연료봉 재처리 작업으로 성공적으로 가고 있다'라고 강변하자 국내외 언론이 당혹스러워 하는 눈치다.

누군들 걱정되지 않겠는가 마는 반문명적 침략행위는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지구촌의 공통된 의견이다. 아무도 할 수가 없어서 그렇지 미국이 쓰고 있는 도덕적 판단이라는 가면을 벗길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걸 그대로 두고 평화 공존 운운하는건 공허한 일일 뿐이다.

경의선이 어서 복원되기를 바라는 건 어느 한두 사람의 바람만은 아니다. 개성공단이 들어서고 남북경협이 활성화되면 먼저 송도에 가보려고 맘먹었었다. 송도에 가면 화담을 사모했던 황진이의 애달픈 가락부터 읊조리고 싶다.

저 고려인으로 살다간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 선생은 또 어떤가. 운곡은 일찌감치 세태의 무상한 변화를 통찰하고 강원도 치악산 상원사 언저리 물 맑고 그윽한 골짜기에 몸을 숨겼다. 그는 스스로 밭갈고 씨뿌려 부모를 봉양하고 처자식을 부양하였다. 고려 왕조의 흥망과는 상관없이 제 갈 길을 거침없이 간 사람이다.

'옛 선비는 치세를 만나면 그 임무를 피하지 않았고, 난세를 만나면 구차하게 머물지 않는다'던 백이와도 다른 역사의식을 가진 분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조선왕조의 창업 자체는 천운으로 돌렸지만 신흥무인 세력들의 패륜적 만행에 대하여는 털끝만큼도 용서하거나 타협하지 않았다. 쿠데타 원흉과 야합을 하다가, 그도 모자라 일본군 장교출신 박정희 기념관을 짓겠다고 정권 마지막까지 버틴 추악무비한 무리들과는 비교되지 않는다. 운곡선생은 산 속에 은둔해 있으면서 자기 시대를 기록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일생 동안 737題 1144首의 한시를 남겼는데「耘谷詩史」가 그것이다. '원천석이 시에서 보여준 역사적 증언은 한 선비가 역사의 왜곡을 막는 주체적 자세'를 지켜내려는 견고함이었다. 그의 삶에는 역사를 꿰뚫어 보려는 형안이 번득인다. 그는 '시의 맑은 기운이란 바로 마음이 맑은 것이며, 이는 바로 하늘의 맑은 기운을 흡입할 때라야 실현된다'고 했다.

자연 속에 살면서 얻은 생에 대한 깨달음이 그의 작품 속에 녹아있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사림문화를 거론하거나 절의 정신을 논할 때 포은 정몽주로부터 정암 조광조에 이른 것으로 보는 것이 통설처럼 되어 있다.

호남이 진실로 우려하는것

그런데 그들의 정치적 부침(浮沈)이나 은거한 모습이란 대개 관료 지향의 방편으로서 일시적 낙향의 의미 이상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도인으로서 운곡의 삶은 재평가되어야 한다. '도통정맥'의 시작이라는 입장에서다. 그는 고려왕조의 몰락과 함께 운명을 같이한 절의파에 속하지도 않았고, 정도전, 하륜처럼 왕조의 개창에 몰입하지도 않았다.

또한 신왕조의 건국에는 반대하면서도 표면적으로는 동조한 이색처럼 표리부동하지도 않았으며, 두문동 72현의 관념적인 은둔과도 구별되는 삶을 보여준 인물이었다. 운곡의 목소리는 이렇다. '눈마자 휘어진 대를 뉘라서 굽다던고/ 구불절(節)이면 눈속에 푸를소냐/ 아마도 세한고절은 너뿐인가 하노라.

'문화수도'가 어떤 것인지 잘 알지 못한다. 도청 이전 문제도 되새길 때마다 머리를 무겁게 한다. '광역시'라는 이름으로 광주·전남이 갈라지고 '첨단산업단지'라는 이름으로 문전옥답이 황폐화된 게 엊그제 일이다. 이 지역민들이 진실로 우려하는 것이 단순히 몇몇 자리로 얘기하는 '호남소외' 따위겠는가.

새 정부 탄생의 밑거름에는 남북이 하나되는 오월정신이 강물처럼 일렁이고 있었다고 믿는다. 영변 약산의 진달래꽃이 그립고 운곡 선생의 깨끗한 삶에 숙연한 것도 그런 열망 때문이다.

/정규철(호남학진흥원 전문위원. 광산중 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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