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상무대 43년-아이러니의 땅...광주의 밑천
2. 상무대 43년-아이러니의 땅...광주의 밑천
  • 시민의소리
  • 승인 2001.03.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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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무대는 어차피 옮길 수 밖에 없었드만..." 송재구 전 광주시 행정부시장(현 중앙인사위원)이 최근 한 사석에서 상무대 이야기가 나오자 여러 얘기 끝에 맺은 말이다. 얘기인즉 상무신도심을 보면 치평동이 있고, 평화를 다스리는 곳에 전쟁을 준비중인 군부대가 오래 있을 수 있었겠느냐는 지적이다. 사실 '상무'라는 지명은 엄밀히 말하면 '반문화적'인 작명이다. 대개 지명이라는게 지세나 지형 등을 반영하기 마련인데 '상무'는 상무대라는 군부대가 50여년 동안 주둔했다는 인연으로 지어졌다고 밖에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치평'도 언제, 누구에 의해 어떻게 작명됐는지 유래가 밝혀지지 않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60년대초반 처음 '치평'이 등장한다. 평화를 추구하는 군부대의 역설적인 염원을 담은 작명인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이같은 지명간의 아이러니가 후세 호사가들에게 두고두고 회자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현 상무지구는 원래 크고 오래된 버드나무 두 그루가 있어, 쌍버들에서 쌍·류촌(雙·柳村)이라 칭한 것이 오늘날 쌍촌동으로 이어진 것으로 전해 내려 온다. 하지만 쌍촌동에 상무대가 들어온 것은 느닷없는 일은 아닐 수도 있다는 추측이다. 과거 이 지역은 군대와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광산군 군분(軍盆)면에 속했기 때문이다. 물론 군분면이라고 해서 과거 군부대가 있었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소리나는 대로 표기하다가 쉬운 한자인 '군'자로 불리웠을 가능성도 없지 않은 탓이다. 상무대는 43년간 광주에 있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1월6일 육군장교의 전투기술 연마를 목적으로 현 광주시 서구 쌍촌, 치평, 유촌동과 광산구 마륵동 일대 90여만 평의 대지에 군 교육기관으로 활용되다 지난 95년 1월17일 장성으로 떠난 것. 상무대가 광주를 떠났지만 그 영향은 아직도 곳곳에 남아있다. 우선 시민들에게 군대의 정체성에 대한 수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상무대가 막 광주에 입성할때만해도 군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는 절대적이었다. 분단체제에서, 특히 전쟁당시 광주에 첫발을 내디딘 군대에 대한 지역민들의 시선은 사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굴절된 현대사에서 '합법적 폭력집단'인 군대가 지역민들과 대립하는 사태가 빚어지면서 과연 국군은 누구를 위한 군대인가라는 의구심을 갖게 된다. 역사는 이같은 비극을 3번이나 반복했다. 상무대는 여순사건 이후 한국전쟁에 이르는 동안에는 빨치산의 토벌과정에서 진압군의 기지이자 포로수용소로, 4.19혁명 당시에는 계엄령에 따라 시위대에게 발포하고 다수를 체포하여 감금하며 지역민과 대립했다. 물론 빨치산은 극명한 좌우이념대립의 산물이고 4.19때만해도 군은 체포한 학생들을 곧바로 학교로 인계하는 등 자신의 본분을 지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결정적인 고비는 역시 5·18민중항쟁이었다. 공수부대에 의한 무차별적인 폭력과 살상은 당시 군대에 대한 광주시민의 감정을 극도로 악화시켰다. 특히 상무대는 진압군의 총본부였으며 군 영창안에서 체포된 시위대를 감금, 고문했던 사실은 군대의 폭력성과 부정적 이미지를 확산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상무대는 한때 5월단체와 김대중대통령이 야당총재시절 시민공원으로 조성하고 망월동 묘역을 옮겨 성역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하기도 했다. 아픔의 역사도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정부는 상무대 부지의 일부만 광주시에 무상양여함에 따라 현재는 상무대 영창만을 인근에 5·18자유공원이란 이름으로 이전해 당시의 비참한 상황을 재현, 그날의 기억을 되살리게 하고 있다. 상무대가 지역사회에 미친 경제적 파급효과도 만만치 않다. 상무대에 43년동안 80만명의 장교가 거쳐가면서 이들로 인해 광주지역경제의 밑천이 형성됐다는 분석까지 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군부대가 주둔하면 우선 군인은 물론 그 가족 등 상주인구가 증가하고 그 결과 상업의 발달로 이어진다. 특히 상무대에 근무하는 병력은 대부분 장교들이기 때문에 휴일을 맞아 외출, 외박하면서 사용한 경비는 상무대 인근뿐만 아니라 광주의 도심상권형성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물론 군부대가 주둔한 결과 발생한 부정적인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혹자는 광주가 소비도시로 자리잡은 이유도, 광주지역에 자리잡은 몇군데 향락촌도 사실은 군부대가 주둔한 결과가 아니냐는 분석을 내놓는 이들도 적지 않다. 다만 상무대와 인해 광주에 대한 외부의 인식이 어떻게 자리매김됐는지는 긍·부정적인 측면을 속단하기 어렵다. 43년간 광주 상무대를 거쳐간 80만의 장교들과 그 가족 등은 광주를 지금 어떻게 생각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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