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걸 선배에 대한 비난 반론
윤재걸 선배에 대한 비난 반론
  • 시민의소리
  • 승인 2003.01.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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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소리에 연재된 글들을 읽고 보니 너무도 평소의 윤재걸 선배답다는 생각이 든다. 윤선배가 아니면 이와 같은 직선적인 글들은 결코 읽어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광주의 젊은 친구들이 윤선배를 너무 잘 모르는 것 같고, 정치권 인사들이 일방적으로 음해를 하는 것만 같아 내가 아는 점 몇가지만 광주시민 여러분께, 특히 지난 70년대, 80년대를 제대로 모르는 20-30대 네티즌 여러분께 윤선배의 진면목을 알려드리고자 한다. 1백65센티의 작은 몸집에서 터져 나오는 그의 당찬 결단은 언제 어디서나 상상을 초월한다. 윤선배가 `동교동 해체`와 관련된 이 글들을 호남 지역신문에 게재함으로써 입을 엄청난 음해와 피해를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를 말리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윤선배는 후배의 충고를 거절하고 일을 저질렀다(?). 일면 이해하면서도 서운하다. 그러나 윤선배는 이같은 시대적 용기를 온몸으로 감수하는 배짱과 용기를 언제 어디서나 발휘해왔다. 그것은 윤선배의 말대로 “시대를 앞서가는 자에 의해 언제나 시대의 문은 스스로 열리게 돼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알기로 윤선배가 DJ와 구체적으로 맺은 첫 인연은, 김대통령이 `마지막 대선`이라고 예언했던 지난 71년 4.27 대통령선거에서 `스피치라이터`를 맡아 서울 아현동 로타리에 소재한 `서서울아파트`(16평)에서, 당시 친구요 동지였던 김홍일 의원과 비밀리에 은거하면서 김대중 대통령 후보의 주요 스피치를 작성하는 역할을 담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사실은 중앙정보부에 얼마 후 포착돼 그가 그토록 바라던 학자의 길을 접게 만드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재학중이던 연세대학교 대학원 정치학과를 중퇴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교육공무원이던 아버지를 인질로 삼은 비밀경찰의 협박으로 서울로부터 광주대공분실로 강제호송돼 (71년 8월17일) 3박4일의 가혹한 조사를 받고, 71년 8월20일 사단보안사를 거쳐 향토사단인 31사에 강제입영 당하고 말았다.

두번째 인연은 입영후인 71년10월 `서울대 내란음모사건`(조영래-심재권-이신범-장기표)의 `배후조종과 자금지원` 혐의로 몰려 군대생활 2개월 여만에 전방에 위치한 26사단 보안부대를 거쳐 서울 효자동의 보안사령부와 용산 서빙고의 수사분실을 거쳐 안기부 남산 지하실에서의 12박13일간의 가혹한 고문 끝에 결국 하반신마비로 `들것`에 실려 나온 후 척추수술을 두번이나 받았다는 사실이다. 학생운동으로 모두가 크고 작은 고문을 받긴 했지만, 윤선배처럼 온갖 고문을 다 당하고 척추수술을 두번까지 당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가 허우대는 멀쩡한 것 같지만(형수님도 사실은 잘 모른다!) 등산을 삼가하고 섣거나 앉아 있거나 간에 30분에서 한시간을 넘지 못하는 이유나, 그 흔한 골프를 멀리하는 이유를, 그리고 술좌석에서 양손으로 항상 탁상을 받쳐든 이유를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선배를 따르는 후배들은 언제나 술좌석에 앉은 그의 담대한 모습과 올곧은 많은 글들만을 보았을 뿐이다. 이러한 모든 인연의 단초는 절친한 친구요, 학생운동 동지였던 김홍일이라는 한 인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셋째 인연은 80년 5.18광주민중항쟁을 맞아 윤선배가 동아일보 기자로서 누구보다도 진실취재에 앞장섰다(당시 동아일보 사보 `동우`지 참조)는 점이다. 3박4일의 광주현장 취재 후 그는 동아일보 편집국 취재보고대회에서 책상 위에 올라가 “여러 선후배들이 평소 신뢰하는 저 윤재걸이 육안으로 나라의 군대가 광주시민을 살륙하는 현장을 똑똑히 보고 왔습니다. 동아일보가 이같은 진실을 보도하지 않는다면 훗날 엄청난 역사적 죄과를 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만일 사실과 다른 거짓보도를 한다면 차라리 보도를 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그 결과, 이같은 보고내용은 왜곡되어 윤선배는 80년 8월9일 전두환 일당(합수부)으로부터 강제해직 됐다. 죄명(?)은 `제작거부`라는 명목이었으며, 가당찮게도 32명의 동아일보 해직자중 박권상 당시 논설주간(현재 KBS 사장)과 대등하게 평기자인 윤선배 단 두사람만이 동아일보로선 A급 대상자로 꼽혔다. 더군다나 윤선배는 1천7백여명이 전두환 합수부의 강압에 따라 사표를 제출했지만 그는 `사표를 내는 것 자체가 언론자유를 스스로 반납하는 것`이라며 `사표 거부운동`을 앞장서 주도했다. 윤선배는 자신의 주거지를 피해 인천 주안에 있던 고등학교 동창 소유의 제재소에 일주일간 숨어 지냈다. 청와대 공보비서로 들어간 김대곤 후배를 비롯 20여명의 후배가 사표거부에 서명을 했으나 마지막까지 사표를 안낸 인물은 오로지 윤재걸 선배 한 사람뿐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80년 동아일보 2층 벽에 붙은 `인사 방`은 윤재걸 선배의 입장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31명의 `의원해임`이 하나하나 나열된 끝에 50센티를 건너 윤재걸 한 사람만이 `해임`으로 적혀 있었다고 한다. 당시 노태우 보안사령관이 전두환에 올린 `언론관련 보고서`에 따르면 전 언론기관의 A급은 총32명으로 이들은 `해외출국금지 및 취업금지자`로 분류됐다고 한다. 그 결과 윤선배는 어디에도 취직을 못하고 이른바 `르뽀라이터`로서 `탐사보도`의 선구자 역할을 한 것은 역설적으로 전두환의 덕이라고 해야 할 것이었다.

넷째 인연은 한겨레신문 기자로 재직중 89년3월에 터진 이른바 `서경원 의원 밀입북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윤선배는 언론인으로서 일생일대의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진실보도가 우선이냐, 인간적 정리가 먼저냐` 라는 갈림길에 섰기 때문이다. 한겨레신문 정치부장대우로서 윤선배는 당시 김대중 평민당총재를 음으로 양으로 돕기 위해 국회반장으로서 야당반장을 자원했다. 그 결과, 김총재의 북구라파 5개국 순방의 취재반장(출국후 경향신문 황우현 기자가 대행)을 수행하면서 서경원 의원의 밀입북에 관한 특종취재를 얻어냈다. 민주화운동의 화신인 김총재에 대한 의리로써 윤선배는 김총재의 서의원에 대한 밀입국 인지사실(불고지죄 혐의)을 안기부와 서울지검 공안검찰의 끈질긴 추궁과 협박에도 불구하고 이를 끝내 막아냄으로써 김총재의 정치적 매장을 온몸으로 방어해냈던 것이다.

윤선배는 이보다 앞서 당시 언론인으로서 앞날이 보장된 동아일보 논설위원 제의를 뿌리치고 급여가 열악한 한겨레신문 창간(88년 5월15일)에 서둘러 참여함(88년 4월1일)으로써 민주언론의 개척자적 역할을 주도했다는 점도 기억할만하다. 그는 80년 해직기자의 대표주자에 다름 아니었기 때문이다.

윤선배는 이상의 여러 사유로, 특히 `김대중 총재의 비밀특보` 라는 언론계 후배들의 오해 아닌 오해를 받아 본의 아니게 한겨레신문을 스스로 그만두게 된다. `서경원의원 밀입북사건`과 이에 대한 사내의 억울한 입장 그리고 이른바 `조평사태`(조선일보-평민당 싸움)로 인한 언론권에서의 사시적 시각을 결연히 딛고 일어서서 윤선배는 `윤재걸 언론연구소`를 차리고 정치권에 잘못 들어선 그간의 잘못에 대해 자성의 계기를 갖게 된다.

그러던 중 윤선배는 고향인 광주에서 강요한 선생과 문병란 선생을 모시고 김준태 박호재 등 몇몇 후배들과 함께 광주지역신문(주간)의 창간교육을 하고 있던 중, 김홍일로부터 긴급한 연락을 받게 된다. 1991년 1월5일 김총재의 생신을 하루 앞둔 날, 서둘러 서울에 올라간 윤선배는 친구인 김홍일의 신신당부대로 1월6일 이른 새벽 6시반께 동교동 거실에 당도하게 됐다고 한다. 동교동 거실은 입족(立足)의 여지가 없었으며, 김총재는 버선발로 맞듯 윤선배를 환영하면서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윤동지의 고마움을 거듭 강조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김총재는 “윤동지와 나는 따로이 만나 할 말이 있다”면서 지하에 있는 서재로 안내하더라는 것이다. 이른바 `서경원의원 밀입북사건`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의정활동에 따른 약속과 그의 `공천약속`이었던 것이다.

이후 윤선배는 91년 1월12일, 본의 아니게 당 수석부대변인으로 지상발령을 받아 당에 근무하게 됐으며, 얼마 후 `꼬마민주당`과 통합되어 노무현 현 대통령 당선자가 대변인으로 갑작스레 발령을 받아 박우섭, 김부겸 부대변인 등과 함께 잘 지냈다고 한다. 노무현 대변인과 함께 당 수석부대변인으로 그와의 관계를 비교적 잘 유지해오던 윤선배는 91년 10월 추석 닷세 후 부친상을 맞았는데, 노대변인이 광주에 제일 먼저 내려와 문상을 했던 일은 아직도 가족들 간에 잊혀지지 않은 일화가 되고 있다고 한다.

노무현 대변인과 함께 통합민주당의 대변인실을 잘 꾸려가던 윤재걸 수석부대변인은 14대 공천을 앞두고 광주 북구의 갑.을 분할에 따른 공천문제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이러한 공천문제에 대해 노대변인은 대단히 객관적이었으며, 윤선배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 냉정하다는 판단을 했을 법하다. 노 대변인은 윤선배에게 “너무 염려말라 8대2로 조강특위(조직강화 특별위원회)에서 공천자로 이미 통과됐다 ”며 안심을 시켰다. 그러나 결과는 전혀 달랐다. 김대중과 권노갑, 이기택과 김모 비서실장 등 4인이 마지막 결정한 공천자 내용은 광주북갑에 윤선배가 아닌 박광태로 바뀌어져 있었다. 오로지 노무현 대변인의 말만 믿고 있던 윤선배로선 한마디로 세상이 노랬다고 한다. 정치권 인시들이 대부분 윤선배와 노무현 당선자의 혈핵형이 같은데 어떤 사유로 두 사람 사이가 벌어진지를 모르겠다고 말하는 이들의 의문을 풀어줄 이유의 배경일 것 같다.

윤선배는 그 이후로 `당헌금 10억원을 납부하라`는 여러 관련 체널의 압력을 묵살하고 있던 중, 92년 1월29일 밤 11시 45분께 “더 이상 방어할 수 없다. 공천헌금 10억원의 반(5억원)이라도 내일 오전(1992년 1월30일)중까지 반드시 입금시켜달라. 5억원을 내겠다는 경쟁자가 생겼다”라는 당 핵심자의 최후통첩을 받고 윤선배는 밤새워 고민고민 했으나, 결국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 이를 파기한 결과로 끝내 공천에서 탈락했다는 것이다.
그 이후 1992년 3월, 윤선배가 통일국민당 후보로 광주동구에서 14대 총선에 출마한 사실이나, 97년 대선과정에서 이인제 후보의 언론특보를 맡은 것을 두고 애써 비난하거나 부정적 견해를 표출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됐다는 느낌이다. 이같은 윤선배의 선택을 두고 무슨 범죄행위처럼 논란을 벌이는 호남인들은 대한민국의 이단자들이란 말인가. 호남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어느 한사람(김대중)을 지지해야 된다는 법이 있는가 말이다. 이러한 일률적인 정서야말로 부끄럽기 짝이 없는 지역할거주의에 의한 지역감정의 정체가 아니고 뭐겠는가. 말로는 지역감정 불식을 주장하면서 실제로는 지역감정의 노예가 돼있는 호남인들의 한계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와 함께 윤선배가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 `김대중 교주`라고 애써 표현한 것은 남다른 의미가 있다고 본다. 윤선배가 어느 글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추종하는 이후락 등의 언급을 통해 `박정희 교주`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이후 박정희는 일종의 교주와 같은 역동적인 모습으로 이 나라 `개발독재`의 카리스마로 군림한 적이 있다. 반민주적 군사독재자로서, 그러나 박정희는 개발이라는 절체절명의 민족적 과제를 앞세워 자신의 독재정치를 정당화했다. 그 결과 관련학자들은 그의 정치행태에 대해 `개발독재`라는 별칭을 붙여주고 있다.

새로운 종교는 언제나 당대의 권력으로부터 사교로 비난받기 마련이었으며, 으레 이단으로 출발했다. 이 나라에 처음 들어온 불교가 그러했고, 천주교(기독교)가 다 그러했다. 그 결과 초창기에는 많은 교인들이 박해를 받았고 희생됐다. 그러한 논리로 개발독재의 박정희 교주에 맞선 민주화 인사들도 적지 않게 희생됐다. 권력자 박정희에 홀로 맞선 김대중도 그런 의미에서 70-80년대의 이단이요, 사교의 대표적 교주나 다름없었다. 로마 제국의 빌라도 총독에 맞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역시 당대의 이단자요, 사교의 교주였다고 볼 수 있다.

윤선배는 김대중이라는 인물이 박정희와 전두환이라는 군사교주를 부정하고 홀로 살아나는데 힘을 합쳤으나 그가 80년대말 이후 아무도 김대중 교주에 대해 `아니요`를 말할 수 없던 엄혹한 시대에 (특히나 `DJ교`의 메카인 호남지방에서) 홀로 일어나 광야에서 소리치듯 김대중 교주의 잘잘못을 낱낱이 캐물었던 것이다. 호남을 지배한 `김대중교`에 대해 윤선배는 거의 유일한 이단이요, 사교적 자세를 견지했던 셈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반격은 너무도 거셌다. 그는 92년 그를 비판하고 부정한 이후,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거의 갖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10년여만에 김대중 교주로부터 직접 하달된 `동교동의 해체지시를 접하는 윤선배의 감회는 그 어느 누구보다도 남다를 것이 분명하다.

호남인들은 자신이 깊이 알지 못하는 인물을 너무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에 어느 인물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너무 쉽게 매료당하는 경우도 흔하다. 이처럼 호.불호의 잘못된 판단을 하다보니 후회하는 모습도 그만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타지역민들로부터 역사적으로 `가벼운 감성의 소유자`로 비판받는 이유도 아마 거기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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