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오늘]삶의 리얼리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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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민의소리
  • 승인 2002.11.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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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희담[소설가. 단편 '깃발'외 다수]

1.립스틱 짙게 바르고

나는 요즈음 립스틱을 짙게 바른다. 평생 제대로 화장 한 번 안 한 내가 뒤늦게 립스틱을 바르는 이유는 손녀가 좋아하기 때문이다. 아기는 밝고 찬란한 빛깔을 좋아한다. 때로 연지곤지도 찍어바르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다. 중간색 옷들은 벗어버리고 삼원색 위주로 옷을 입는다. 화사한 레이스에 꽃무늬가 수놓인 옷들이다.

어느 날 친구들이 들이닥쳤다. 마침 립스틱을 바른 것도 모자라 코에까지 붉은 점을 칠하고 있었다. 아기는 삐에로를 좋아해 어쩔 수 없이 삐에로 흉내를 내고 있던 참이었다. 친구들이 한 마디씩 내뱉었다.

"엽기다, 엽기."
"창가에 앉아 차를 마시며 예술이나 논해야 할 네가 어쩌자고 이렇게 망가졌냐."

엽기인지 망가졌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지금의 내 모습은 처녀시절 내가 꿈꾸던 모습은 아니다.

사르트르와 카뮈, 홍명희와 이상의 작품세계의 차이점은 물론이고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거나 글을 쓰지 않으면 무식해질 것 같아 자신을 다그치던 예전의 나의 모습은 분명 아니다. 현실에 안착하지 못하고 늘 들뜨고 무언가를 그리워하던 내가 삶의 전환을 이룬 것은 해남으로 솔가하고 나서였다.

태어나서 자라고 교육받아온 서울을 떠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1977년의 해남은 도로 포장도 되지 않은 유배지 비슷한 읍내였다. 남편은 그 특유의 현실감각으로 농촌현실에 파고들었고, 그것이 작품세계에 충실히 반영되었다. 그것 하나만으로 보람을 느끼면서 나는 서서히 적응을 해나갔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황톳길. 차츰 내 안에 형성된 가상의 현실이 거두어지고 생생한 현실이 자리잡게 되었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경이로웠다. 지금도 나는 '토종'이라는 어휘에 매료되는데, 그 사람들이 바로 토종이었다.

황톳빛=토종=그 사람들=살아움직이는 생생한현실.< BR>
이런 연결고리가 내 삶을 휘저었다. 현실감각은 모든 분야를 명확히 볼 수 있는 척도인데 토종의 사람들은 소위 예술이나 문화에 대해서도 관점이 정확했다. 그 사람들과 있으면 나는 때가 너무 묻은 것 같았다. 때를 벗고 땅의 속살과 같은 토종이 되고 싶었다.

1980년 5월이 또다시 나의 삶을 전환시켰다. 허무주의와 딜레땅뜨적 안목, 유희적 종교 등이 걷히고 새로운 삶의 질서가 자리잡게 되었다.

2. 김치를 담그며

1980년 5월 이후 사회 모순은 곧바로 일상과 직결되었고, 가까운 벗들은 죽거나 수배되었다. 일상은 모험이었고, 평범한 생활은 유토피아처럼 저만치 물러나 있었다.

적막강산이었던 그 시절, 그나마 우리집이 사랑방 구실을 했다. 밥상을 끝도 없이 차렸다. 남도 사람들 입맛이 좀 까다로운가. 부끄럽게도 나는 밥 한번 지어보지 못하고 시집을 왔다. 그러던 내가 부엌살림에 이골이 났다. 광주는 나를 생활인으로서 훈련을 시켰다.

나와는 반대 경로를 걷게 되는 후배가 있었다. 그 후배에게 김치 담그는 솜씨를 배웠는데, 내노라 하는 살림꾼이었다. 맛깔 나는 솜씨로 손님들을 거두어 먹였고, 집안은 온기가 가득했다. 변혁운동에 헌신적이었던 그녀는 어느 때부터인가 살림을 제쳐놓고 온갖 집회며 투쟁에 참여했다. 김치는 꼭 담가 먹으라고 몇 번 당부한 적이 있었다. 이를테면 생활의 끈을 한 가닥이라도 잡고 있으라는 뜻이었다.

복합적인 여러 요인으로 그 후배는 우울증이 깊어져 이승을 떠났다. 김치라도 때맞춰 담가 먹었더라면 어이없이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삶의 리얼리티란 있는 자리에서 얼마만큼 생활과 밀착되어 있는 것인가를 의미한다. 광주는 나에게 삶의 리얼리티를 깨닫게 해준 버팀목이다.
그래서 오늘도 기꺼이 립스틱 짙게 바르고 아기와 논다.

/홍희담(소설가. 단편 '깃발'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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