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오늘]무각사 문화원
[투데이오늘]무각사 문화원
  • 시민의소리
  • 승인 2002.10.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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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준[언론인, 전 언론노련 사무처장]

무각사라는 절이 있다. 광주 상무신도심 한 가운데 있는 절이다. 도심에서 멀지 않으면서도 5.18공원에 둘러싸여 있어 제법 한적한 느낌을 준다. 절간의 배치도 그런대로 여유가 있어 일상의 번잡함을 피하고 싶을 때 가끔 다녀오곤 했다.

그 무각사 한쪽에 콘크리트 건물이 올라가고 있다. 문화원을 짓는다고 한다. 이미 짜여진 터에 새 건물이 들어서기 때문일까. 공간의 여유를 메우며 올라가는 콘크리트 건물이 왠지 뻑뻑하다.

최근 이 문화원 공사비 5억원이 이상한 방법으로 충당됐다. 국가 예산을 받아 광주시가 지원한 것인데, 행정자치부가 배정한 명목은 '월드컵 경기장 주변도로 공사비'로 되어 있다. 그런 것을 광주시가 무각사 문화원 공사비로 바꿔 지원한 것이다.

이 돈에 대해 행자부 공무원은 도로 공사비로 보낸 것이라고 하고, 광주시 공무원은 행정자치부에서부터 무각사를 지원하라고 보낸 돈이라고 한다. 누구 말이 맞는지 확인하기 어렵지만, 어느 쪽이라 해도 잘못이다. 도로공사비로 준 돈을 특정 사찰 지원에 썼다 해도 문제고, 특정사찰을 지원하면서 도로공사비 명목으로 돈을 보냈다 해도 문제다.

국회의원은 시주도 국가 예산으로 하나

이런 상황에서 문제가 제기되는 것은 당연하다. 시민단체들이 나섰고, 언론들도 그 부당함을 알렸다. 광주시의회 의원들도 예산 삭감을 벼렸다. 그런데 이 예산이 광주시의회를 통과했다. 어찌된 영문일까. 예결위 심사과정에서 한 의원이 했다는 말은 저간의 사정을 짐작케 한다. '나는 반대한다. 그러나 중앙의 뜻이라서 어쩔 수가 없다'

중앙(?). 한 때 북한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당 중앙이라 부른다는 말은 들었지만, 아무래도 생소하고 권위적인 냄새가 나는 말이다. 사정을 알고 보니, 서울에 있는 국회의원, 그러니까 지구당위원장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논란이 제기되었을 때 광주시 공무원들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이 예산확보에 이 지역 출신 유력 국회의원이 개입했다는 얘기다. 이 절에 자주 다니는 국회의원이 시주를 한 셈인데, 이 나라 국회의원은 시주도 국가 예산으로 하는가. 평생 살아야 꼬박꼬박 세금만 낼 뿐, 국고 지원이라고는 꿈도 못 꿔 본 서민들 입장에서는 상상조차 어려운 일이다.

세상엔 염치라는 것이 있다. 아니 있어야 한다. '게임의 룰'이라는 말도 같은 말일 것이다. 남이 보지 않는 책상 밑에서 자기들끼리 뚝딱거릴 때라면, 약간의 변칙도 있을 수 있다고 하자. 그러나 그것이 대명천지로 나와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고 난 뒤에도, 권력을 가졌다는 이유로 그냥 밀어붙인다면, 예전의 독재자들과 무엇이 다른가.

선진국의 지도자들은 사소한 잘못이더라도 그것이 밝혀지면 '잘못했습니다' 하고 그 자리를 떠난다. 그것이 상식이다. 모든 사람들이 어떤 잘못도 저지르지 않을 순 없지만, 최소한 드러난 잘못은 시정되어야 한다. 그런 사회를 우리는 '건전한 사회'라고 부른다.

국회의원, 성직자, 고위공무원, 시의원. 이 지역 뿐 만 아니라 국가사회 경영도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다. 이들이 '염치'도 '게임을 룰'도 없이, 그저 권력으로 밀어붙이는 것만 능사로 안다면, 우리 사회의 미래는 없다.

영혼과 생명위한 아름다운 길 있을 터

기자인 나는 국고가 편법으로 특정 사찰에 지원되는 비상식의 현실을 온 국민들에게 낱낱이 알려야 했다. 그래야 기자로서 직분을 다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이 중앙부처에 알려질 경우 '국가예산을 따오기 어렵다'는 광주시 공무원들의 하소연에 묶여 지역뉴스로 처리하고 말았다.

그럼 이제 어쩔 것인가. 이 부조리는 그냥 용인되어야 하는가. 다행히 아직 길은 남아 있다. 예산이 책정되었다고 해서, 모든 돈을 다 써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 돈을 집행하지 않을 수 있는 권한이 광주시에 있다. 지금이라도 이 돈의 확보에 간여한 국회의원이 지원 계획을 취소하라고 한다면 더 쉬운 일 것이다.

아니다. 무각사의 스님이 스스로 그 돈을 받지 않겠다고 나선다면 더 아름다운 일이 될 것이다. 그런 일을 기다려보는 것은 '세상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생활에 찌들 때, 심신이 피로할 때, 성직자를 찾아 길을 묻는다. 우리의 영혼과 생명을 위한 길을 묻는다. 그런데 이제 무각사에 가면 어떤 길을 물어야 하는가. 속임수로 국고를 지원 받을 수 있는 그런 길을 물어야 하는가. 그 좋은 절에 세워진 문화관을 불법(佛法)이 아니라 편법(便法)의 상징으로 만들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무각사라는 절이 있었다.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가끔 들렀던 곳이지만, 아무래도 예전처럼 마음 편히 찾기는 이제 그른 일인 것 같다.

/정병준(언론인, 전 언론노련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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