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오늘]예수 붓다는 꽃미남이다
[투데이오늘]예수 붓다는 꽃미남이다
  • 시민의소리
  • 승인 2002.10.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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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희담[소설가. 단편'깃발'외 다수]

나의 미의식(美意識)은 꽃미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여학교 시절, 꽃미남 음악선생님이 있었는데 첼로가 전공이었다. 희고 반듯한 이마 아래 눈빛은 항시 먼 곳을 향해 있었다. 나는 그를 '상심케 하는 자'라고 명명했는데, 그가 학교에 나오지 않는 날은 웬종일 상심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첼로 선율에 이끌려 음악실을 엿보았다. 선생님은 악보도 없이 어떤 선율을 연주하고 있었다. 온몸이 감전된 것처럼 전율이 일어났다. 살갗에 묻어나는 생(生)의 감격을 처음 맛보았던 것이다.

그 선율과 다시 조우한 것은 대학시절 고전음악 감상실에서였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세종로와 종로 사이의 허름한 건물 2층 '르네쌍스'가 1960년대의 소위 음악 마니아들의 아지트였다. 나 역시 '르네쌍스'에서 죽치고 살았다.

어느 날 그곳에서 그 선율이 흘러나왔다. 바흐의 첼로 무반주 소나타였다. 그곳을 나와 밤거리를 걸으면서 나는 눈물을 흘리곤 했다. 청춘의 혼돈과 미망과 알 수 없는 아름다움 때문이었다. 무수히 반복되는 일상 속에 그 무엇이 있음을 그 선율은 나타내고 있었다. 그 무엇 때문에 일상은 빛나고 새로워지고 의미있을 것이었다.

그 무엇이 무엇일까.
그 무엇이 예술일 수도 있었고, 사랑일 수도 있었고, 자식일 수도 있었고, 혁명의 열정일 수 있었다. 또는 미의식의 확장일 수도 있었다.

내가 채식주의자가 된 것은 미의식으로부터 출발한다. 어릴 적 시골 외갓댁에서 돼지를 잡는 장면을 본 적이 있었다. 너무 무서워서 할머니 치마폭 속에 숨었지만 비명소리는 뇌리에 각인되었다. 그 비명소리는 아름다움에 위배된다.

소는 죽을 때 눈물을 뚝뚝 흘린다. 공포와 원한으로 죽은 소를 입에 넣는 것은 아름다움에 위배된다.
미의식은 삶의 지침으로까지 확장된다.
탐욕은 아름다움에 위배된다.
분노는 아름다움에 위배된다.
어리석음은 아름다움에 위배된다.
미의식 때문에 이 고통의 바다를 나는 무사히 건너고 있다.

   

불혹의 나이를 지나 새로운 그 무엇이 내게 찾아왔다.
예수, 붓다, 노자, 크리슈나(바가바드 기타의 저자로, 피리 부는 꽃미남으로 묘사된다)였다.
막달라 마리아처럼 예수의 발을 씻어드리고 싶다. 모든 집착을 떨쳐버리고 붓다와 함께 갠지스 강가를 맨발로 걷고 싶다.

노자가 깨달은 천하본무사(天下本無事)의 경지―삼라만상은 지극히 조화로워 본래 일이 없는데 인간의 욕망으로 인해 일이 생긴다―는 아직 체득하지 못했지만 깊이 공감한다. 크리슈나의 16001번째의 부인이 되어 아침마다 꽃을 공양하고 싶다(그에겐 16000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실은 제자였다).

그들이 설파한 일원론을 나는 전적으로 수용한다. 그들의 여성성을 나는 찬탄한다. 남성성의 상징인 분리, 반목, 폭력, 전쟁, 파괴, 이원론을 그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다.

남성이 지배한 지난 3000년 동안 전쟁이 5000번이나 일어났음을 역사는 말해주고 있다. 반작용으로, 이제 여성성이 도래할 때이다.

인간에 대한 사랑과 자비 때문에 그들은 남몰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 눈물이 꽃처럼 아름답다. 이제 내가 그들을 왜 꽃미남이라고 명명하는지 이유가 드러났을 것이다. 여성들이 꽃미남에게 열광하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광주의 남성들이여, 부디 꽃미남이 되시라.
여성이 그대의 품에 안겨 행복한 미소를 지을 때 그대들은 지상에서 극락정토 도시를 건설하는 주역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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