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 있는 마을
숨어 있는 마을
  • 시민의소리
  • 승인 2024.09.14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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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박혀 지내는 것이 지겨울 때가 있다. 어딘가로 가서 헤매다가라도 오고 싶다. 오늘이 그런 날이다. 아내 차를 타고 아무 데나 가자고 했다. 그렇게 나선 길인데 대로를 달리다 보니 길가 골목 입구 같은 곳에 지역 성당을 알리는 작은 간판이 걸려 있다.

우리는 그 골목길로 들어갔다. 불과 몇 분을 들어갔을까, 처음 본 듯한 풍경이 다가선다. 차에서 내려 동판에 설립일이 적혀 있는 19년 된 성당 구경을 하고 주변 길을 걸어서 어디가 어딘지 모르는 낯선 동네 길을 걸어 다녔다.

도시의 북적거리는 거리에서 갑자기 다른 시대의 마을로 숨어든 느낌이랄까. 평온하고 고요하고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먼 과거의 시대로 들어선 듯하다. 동네는 사진에 찍혀 있는 풍경처럼 움직임이 없다.

어느 집에서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것만 같다. 집집의 둘레에는 손바닥만 한 공터들이 있는데 처음 보는 꽃들이 그 터에 함부로 우거져 피어 있다. 한참 이리저리 걸었으나 한 사람도 동네 사람과 마주치지 않았다.

이 동네 사람들은 다들 어디에 갔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일시에 마을 사람들이 어딘가로 사라져 버린 것 같은. 무슨 이런 동네가 있지? 너무나 조용하고 한가롭다. 집들은 단층 가옥이 많고 빌라 건물도 드문드문 있다. 잘 정리되고 깨끗한 느낌은 들지 않지만 소박한 모습이 발길을 붙잡는다.

도시 생활에 시달린 마음을 내려놓게 만드는 무엇인가 모를 것이 이 마을에 있다. 옛날 영화 ‘지난 여름 갑자기’ 같은 분위기, 아니다, 그렇다고 옛 전설의 마을 ‘무릉도원’에 비기는 것은 지나칠 것 같고, 하여튼 나도 모르게 절로 미소가 입가에 떠올랐다.

마음을 평온하게 해주는 무엇인가가 있다. 아마도 이렇게 조용하고 단출하고 소박한 마을이 나는 몹시 그리웠던가 보다. 시간이 멈춘 듯한 한갓진 마을에서 마음이 힐링 되는 느낌이다. 대로에서 그리 멀지도 않는 곳에 이런 마을이 있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도시와 시대로부터 멀리 격리된 아주 오래전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듯한 동네다. 마을 어디에도 흔한 편의점 하나 없다. 마을 변두리로 짐작되는 곳에는 작은 푸른 숲이 성벽처럼 둘러쳐져 있다.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여행해 온 시간 여행자의 느낌으로 무작정 걸어 다녔다. 이상하게도 도시 문명에 시달려온 고달픈 영혼이 맑게 정화되는 듯하다. 현대 문명은 도시 문명이라 할 수 있다. 길을 막는 차와 인도에 물결처럼 움직이는 인파, 그리고 높은 빌딩,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운 밤 불빛이 반짝이는 도시 풍경에 나는 물릴 대로 물렸다.

하지만 이곳에서 떠나 어디로 갈 수도 없다. 그러기에는 나는 이미 도시인이 된 지 오래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말했다. “넌 이제 도시 사람이야. 시골에 내려와서 못 살아야.” 내가 직장 생활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시골로 가서 살고 싶어서 말씀드렸더니 그렇게 답하셨다.

이 작은 마을에 혹한 것은 아마도 그 옛날의 감정이 들고 일어나서인지도 모른다. 도시 안의 시골. 21세기 안의 20세기. 뭐 그런 느낌이랄까. 아버지 말씀대로 나는 도시에서 훨씬 더 오래 살았고, 도시 생활에 익숙해져 있고, 그래서 도시를 떠나기가 어려운 형편이다. 그래서 더욱 한적한 시골이 더 그리운지 모른다.

도시인의 비극은 단출하고 조용하고 소박한 마을을 그리면서도 막상 시골로 간 사람들은 결국 얼마 있지 못하고 도시로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한때 귀향, 귀촌이 유행했는데, 지금은 시들해졌다. 우선 시골에서는 나 같은 몸이 약한 사람은 병원에 얼른 가려면 쉽지 않다.

문화시설도 마땅치 않다. 나이 들수록 병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살면 안 된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심지어 시골 요양원에 살던 사람들이 처음엔 행복해하며 잘 지내다가 몇 년 안 가 시끄러운 도시가 그리워 그만 돌아온다고 한다. 이런 아이러니라니!

마을 돌기를 마치고 차로 돌아오려는데 어느 집 길가 공터에서 꽃을 심는 남자를 만났다. “그것이 무슨 꽃인가요?” “설악초라는 것입니다.” 식물의 잎이 눈에 쌓인 것처럼 하얗다. “좋은 동네네요.” 그러자 그 남자는 우연히 이 마을에 들렀다가 마음에 들어서 이사 왔다고 한다. 내가 그 마을에서 만난 유일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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