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째 비가 내린다. 나는 거실 창을 열어놓고 비가 오는 풍경을 바라본다. 아파트 5층에서는 빗소리가 잘 들리지 않지만, 작은 화살촉 같은 무수한 빗줄기가 빗금을 그으며 내리는 모습은 보인다. 열린 창으로는 대지가 샤워하는 듯 비를 맞는 고즈넉한 모습이 매우 상쾌하게 느껴진다. 무더위에 지친 몸과 마음도 덩달아 생기를 되찾는 기분이다.
빗방울이 끊임없이 떨어지며 모든 것이 조용해지는 이 시간은 마치 세상이 오래전부터 비를 맞고 있었던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비가 내릴 때는 태양이 타오르는 뜨거운 하늘이 생각나지 않는다. 모든 것들이 금방 비의 풍경으로 들어간다. 이것은 내 마음을 적셔주는 휴식과 같다. 마음이 정갈해지고 착해진다.
비가 대지를 어루만지듯 비 내리는 풍경은 나를 어딘가 모를 한 처음으로 데려간다. 한 처음은 어디인가. 어릴 적 여름비가 내릴 때 옷을 벗고 마당에 뛰어나가 비를 맞던 기억이 난다. 대지를 적시는 비가 흙냄새를 피워올리고 아이들은 그 위에서 뛰놀았다.
비는 단순히 물방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것은 시간과 기억을 한데 엮어 과거와 현재를 뒤섞는 마법을 부린다. 알몸으로 빗속에서 뛰놀던 동심은 비가 올 때 더욱 푸르른 나뭇잎들처럼 순수했다. 그 기억은 분명히 과거이지만 현재에도 뚜렷이 살아 있다.
고즈넉한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도시의 소음과 먼지가 사라지고 고요함이 자리한다. 격정에 휩싸였던 마음이 잔잔한 호수처럼 평온해진다. 빗소리는 내가 놓치고 살았던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게 해주는 자연의 손길이다. 어머니가 아기를 잠재우듯 나를 근심 걱정 없는 나라로 이끌어간다. 나는 빗소리에 이끌려 한 처음으로 간다.
여름 저녁의 비는 내게 사색의 시간을 마련한다. 그 사색은 종당에 무념무상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과거의 후회도, 미래에 대한 불안도 모두 내려놓고 지금, 이 순간에만 집중하게 된다. 나는 이래서 여름 저녁에 내리는 비를 좋아한다.
자연이 말을 한다면 바로 빗소리일 것이다. 분명히 빗소리는 무언가를 말한다. 저 건너 작은 숲을 보면 알 수 있다. 빗방울을 맞으며 푸른 나뭇잎들은 흔들리며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다. 여름비가 대지에 말을 거는 놀라운 장면이다.
비가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면, 이 세상 모든 일들을 다 용서하고 싶어진다. 불평, 원한, 미움, 결핍, 이런 것들이 다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세상은 이대로 좋은 것이다. 더 보태고 뺄 것도 없다. 하루 종일 비가 오는 날은, 귀 기울여 들어보면 팔만대장경을 설한 부처의 나라에 와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조금 더 깊이 있는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비가 그치고 나면, 세상은 더욱 선명해진다. 여름비는 우리의 마음을 정화하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게 해준다. 바쁜 일상에서 잠시 멈추어 서서 내리는 비를 바라보는 순간, 우리는 진정한 자신을 마주할 수 있게 된다.
그 차분함 속에서 우리는 소중한 것들을 다시금 되새기고 삶의 의미를 되찾는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나는 한 처음의 깨달음을 얻는다. 나는 본디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니 일상의 욕망이란 게 무엇이란 말인가.
여름날 저녁에 내리는 비는 우리에게 잠시 쉬어가라는 자연의 선물이다. 그 선물 속에서 우리는 일상의 무게를 내려놓고 새로운 결의를 다진다. 비가 그치는 순간, 우리는 다시 세상 속으로 걸어갈 준비가 되어 있다.
그렇게 여름비는 우리의 삶 속에서 마음을 다독이며, 우리를 더욱 강하고 깊이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 나는 이 고요속에서 새로 태어난다. 비여, 한 사나흘 더 내려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