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오늘]세습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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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민의소리
  • 승인 2002.09.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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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준[언론인, 전 언론노련 사무처장]

이회창후보의 큰 아들에 이어 둘째 아들에게도 병역 비리 의혹이 제기됐다. 얼마 전까지 대통령 아들들 얘기가 나라를 흔들더니, 이번에는 '대통령 후보의 아들' 얘기다. 아버지의 권세에 업혀 특권을 누리는 아들. 근대 이전(近代 以前)에나 있어야 할 얘기가 21세기 오늘,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정치권은 그나마 대중의 비판이 살아 있는 곳이다. 서울시장의 아들이 히딩크와 사진을 찍었다가 혼쭐나는 것을 보면서, 그래도 정치권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분간은 할 수 있는 영역이란 생각이 들었다.

사실 우리사회에서 세습이 가장 심한 곳은 기업이다. 우리나라 기업의 창업자 절대다수는 자기 아들에게 경영권을 넘긴다. 경영능력과 상관없이 단순히 자식이라는 이유로 경영을 맡기는 것은 참 무책임한 짓이다. 기업은 합리성을 특징으로하는 근대사회를 이끌어 온 핵심 조직이다. 당연히 기업경영은 가장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맡아야 한다. 그래야만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 남을 수 있다. 선진국은 말할 것도 없고 보통의 나라에서도 다 그렇게 한다. 그것이 상식이다.

사장아들은 당연히 사장되는 전 근대적 기업문화

그런데 우리나라는 어떤가. 대부분 사장의 아들이 다음 사장이 된다. 아들이 없다면 사위나 조카, 사돈네 팔촌이라도 피붙이를 후계자 자리에 앉혀야 직성이 풀리는 나라다. 제국주의에 의해 '주어진 근대'의 틀을 여전히 벗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아직도 우리나라가 '제대로 근대화되지 못했다'는 사회학자들의 지적이 유효해 보인다.

기업의 역사가 한 세대를 넘어 선 지금, 경영세습은 거의 대부분의 기업에서 나타난다. 전국적인 대기업이나 이 지역의 기업이나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기업은 한 가족이 자의대로 세습해도 될만큼 그렇게 간단한 존재가 아니다. 해당 기업의 노동자와 유관기업, 그리고 소비자들까지, 한 기업이 잘못되면 수많은 사람이 불행해지고 피해를 입는다. 이렇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 기업의 경영을 단순히 사장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맡길 수 는 없다.

나는 지금 재산상속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상속이 법으로 보장된 나라에서 사유재산의 상속은 당연하다. 그러나 기업이라는 사회적 조직의 경영을 개인적인 재산상속과 비슷한 개념으로 생각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경영자의 아들은 경영자가 되기에 좋은 환경에서 성장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렇다면 의사의 아들은 의사가 되어야 하고, 연기자의 아들은 연기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이유는, 주어진 환경 못지 않게 개인의 자질과 노력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자질 뛰어난 사람을 선택해 경영수업을 시켰다면 어떤 결과를 나았을까. 출생의 조건 때문이 아니라, 정말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일하게 하는 그런 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건전한 사회다.

소위 후계자들이 어려서부터 보고 배웠다는 경영방식 속에 이제는 없어져야 할 악습도 많다. 개발독재시절, 권력의 비호를 받지 않은 기업은 살아남기 어려웠다. 권력에 잘 보이고 특혜를 받는 것이 예전 기업의 성장방식이었다면, 더 이상 그 안에서 배울 것은 없다.

기업이 구태의연한 방식을 고수하면, 그 기업은 물론이고 우리 사회 전체에 희망이 없다. 기업은 그만큼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할 조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업경영의 세습이 거리낌없이 이뤄지고 있고, 어처구니없게도 우리사회는 그런 현실을 별 비판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30대 사장 술잔에 무릎꿇는 언론사 중견간부

얼마 전 광주시내 한 언론사에 30대 사장이 취임했다. 그 언론사의 중견간부가 나이 어린 사장의 술잔을 무릎 꿇고 받았다는 얘기가 떠돌았다. 이런 얘기를 꺼낸다고 해서 해당 언론사 관계자들이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정말 이 얘기가 사실이 아니길 바란다.

그러나 만일 사실이라면 이것은 불쾌해야 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단언하거니와 그 할아버지가 신문사를 창업하지 않았다면 그 나이에 사장이 된다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좀 더 솔직한 표현으로 말하자. 언론사 사장을 그런 식으로 결정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세상을 향해 비판의식을 날카롭게 세워야 할 언론사의 중견 간부들이 그 풋내기 사장의 술잔을 황감해하며 무릎 끓고 받았다는 것이다.

그 술이 깨고 나면 그들도, 대통령 아들들의 비리를 질타하고, 대통령 후보 아들의 병역비리 의혹에 열 올렸을지 모른다. 그러나, 멀리 떨어진 얘기에 열올리기 보다 내 주위의 일부터 분노해야 한다. 그래야 세상이 바뀐다.

이 칼럼 하나로 경영세습의 악폐가 하루아침에 없어지리라고 기대할 만큼 순진하진 않다. 그러나 무디어진 우리의 비판의식을 향해 분명히 말하고자 한다. '경영세습은 잘못된 것이다'. '이제는 우리 모두 그렇게 인식하고, 그렇게 말해야 한다'고 분명히 이야기 해두고 싶다.

/정병준(언론인, 전 언론노련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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