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39회]-순성장 황진, 진주성에서 순절하다.
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39회]-순성장 황진, 진주성에서 순절하다.
  •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5.31 09: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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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은 말 그대로 고립무원(孤立無援)이었다. 10만 명이나 되는 왜적이 진주성을 겹겹으로 에워싸고 있었고, 명군도 조선군도 도와주지 않았다.
홀로 싸워야 하는 호남 의병들. 어두운 그림자가 진주성에 드리워지고 있었다.

남원 정충사

그러면 1593년 6월 21일부터 6월 29일까지 9일간의 싸움을 살펴보자.
6월 21일

왜군 선봉대 기병 200명이 척후활동을 시작했다. 척후병은 마현 봉우리 위에서 활동하더니, 조금 뒤에 10여만 명의 왜군이 성을 세 겹으로 포위했다. 그런데 왜군은 탄알 한 발 쏘지 않고 위세를 보인 뒤에 물러갔다.

6월 22일
왜군의 첫 공격이 시작됐다. 아침 10시부터 왜군 10만 명이 일제히 밀려왔다. 개경원 산 중턱에 진을 친 가토가 이끄는 1진과 향교 앞길에 있던 고니시의 2진이 동시에 쳐들어왔다. 첫 교전은 아군의 승리였다. 아군은 왜적 30명을 쏘아 맞히니 왜군들이 물러갔다. 초저녁에 다시 한참 동안 크게 싸우다가 2경에 물러갔고 3경에 다시 진격해 와서 5경이 돼서야 물러갔다.

6월23일
이 날도 왜군은 공세를 늦추지 않았다. 낮에 3번 싸워 3번 물리치고, 밤에 또 4번 싸워 4번 물리쳤다.
이 날 고성 의병장 최강과 이달의 군사 300여명이 진주를 구원하려고 달려왔다가 적의 세력에 놀라서 다시 고성으로 돌아갔다.

6월 24일
왜적의 증원군 5∼6천 명이 와서 마현에 진을 치고 또 5∼600명이 더 와서 동편에 진을 치고 아군과 치열하게 싸웠다. 성 안팎에 죽은 자의 수효가 헤아릴 수 없었다.

6월 25일
왜적이 동문 밖에 흙을 메워 언덕을 만들고 그 위에 흙집을 지어서 성 안을 내려다보고서 탄환을 비처럼 퍼부었다. 그러자 순성장 황진도 성 안에 높은 언덕을 쌓았는데 초저녁부터 밤중까지 황진이 직접 옷과 전립을 벗고 몸소 돌을 짊어지고 나르니 성 안의 남녀들도 힘을 다해 축조를 도와 하룻밤 사이에 완성됐다.

이에 현자총통을 쏘아서 적의 소굴을 부쉈으나 적이 곧 다시 만들었다. 이 날도 3번 싸워 3번 물리치고, 밤에 또 4번 접전해 4번 다 물리쳤다.

6월 26일
왜군은 새로운 전술을 시도했다. 군사들이 큰 나무 궤짝 위에 짐승 가죽을 입힌 뒤 그것을 방패삼아 성벽 밑으로 육박해 성을 헐려고 했다.
이에 성 위에서는 비 오듯이 활을 쏘고 큰 돌을 연달아 굴러 내려서 왜군을 격퇴시켰다.
그러자 왜적은 큰 나무 두 개를 동문 밖에 세우고 그 위에 판옥을 만든 뒤 성안으로 불화살을 쏘아 보냈다. 그 불화살이 성안의 초가에 떨어져 화염이 자욱했다. 황진도 마주 보고 나무를 세우고 판자 집을 만든 뒤 대포를 쏘아 왜군의 판옥을 무너뜨렸다. 성안 사람들이 물을 길어 불을 끄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마침 소나기가 내려 불이 꺼졌다.

이 날 거제현령 김준민이 무너진 성벽 틈으로 뛰어드는 적을 막다가 죽었다. 아군 장수 가운데 최초의 희생자였다.

6월 27일
전투가 1주일 되는 날이었다. 왜군은 동문과 서문 밖 다섯 군데에 흙산을 만들었고, 그 위에 대나무로 방책을 만들어 그 위에서 총탄을 발사했다. 성안의 군사 300여명이 전사했다. 또 왜군은 귀갑차를 이용해 성 밑으로 접근해 쇠망치로 성벽에 구멍을 뚫었다. 조선군이 섶에 기름을 붙여 귀갑차를 태우자 왜군이 퇴각했다.

왜군의 공격이 계속되자 진주목사 서예원이 겁을 먹고 허둥거리며 제대로 일을 처리하지 못했다. 김천일은 장윤을 임시로 목사에 임명해 사태를 진정시켰다.

왜군은 최후통첩을 보냈다. 그 글은 ‘온 백성이 성안에서 일시에 모조리 죽음 당하는 것은 처참한 일이 아닌가. 항복하면 생명은 보장해 주마’라는 내용이었다. 김천일은 곧 답장을 보냈다. ‘우리는 죽음으로 싸울 뿐이다. 더구나 명군 30만명이 지금 너희들을 추격해 남김없이 섬멸할 것이다.’라고 적었다. 이 답장을 보고 왜군은 옷을 걷고 볼기를 두드리며 말하기를 ‘명군은 이미 다 물러갔다’ 했다.

6월 28일
1주일이 지나자 왜군은 더욱 공세 수위를 높였다. 왜적이 북문을 침범해 성문을 무너뜨리고자 했다. 이곳은 진주목사 서예원이 지키고 있었는데, 왜군이 성을 뚫는 것도 눈치 채지 못했으므로 성이 무너지려 했다. 적이 바야흐로 가까이까지 밀고 들어왔는데, 김해부사 이종인이 힘껏 싸워 물리쳤다.

왜적이 또 동쪽과 북쪽의 성을 침범해 크게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종인이 다시 물리쳤다.

 황진 묘소 (정충사 뒤)

충청병사 황진이 순찰차 이곳에 이르렀다가 성 아래를 굽어보며, “적의 시체가 참호에 가득하니 죽은 자가 거의 1천여 명은 되겠다”고 말했다. 이 때 왜군 한 명이 성 아래에 잠복해 있다가 위를 향해 철환을 쐈는데 황진의 왼쪽 이마에 맞았다. 황진은 용맹과 지략이 으뜸이어서 그를 믿고 의지했었는데, 그가 죽자 성안이 흉흉해지며 사기가 저하됐다. 이 날 황진의 죽음을 조문하는 듯 장맛비가 음산하게 내렸다.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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