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씨를 심고 나서
꽃씨를 심고 나서
  • 문틈 시인
  • 승인 2023.05.27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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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작은 베란다에 화분이 여러 개 있다. 오래 내버려둔 탓에 화분의 흙은 말라붙어 폐허 같은 느낌이 든다. 나는 화분의 흙을 엎어서 퇴비와 섞어 축축하게 물을 부어주고는 화분에 도로 담아 두었다.

나중에 그 화분들에 상추 모종을 심고, 분꽃, 나팔꿏 씨들을 나누어 심었다. 날마다 물을 주며 가꾸었더니 화분마다 초록잎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나팔꽃이 먼저 싹을 내밀었다. 나는 네 뿌리의 나팔꽃들에 각기 작은 철사 막대를 세우고 막대 끝에 가는 줄을 이어 천정으로 연결했다.

날마다 나팔꽃은 자라나 마침내 막대에 기대어 줄기를 감으며 올라가고 있다. 나팔꽃은 덩굴식물인지라 무엇인가 다른 것에 의지해 타고 벋어가며 자라난다. 곧 막대를 넘어 줄에 도달할 기세다.

참 신기하다. 나팔꽃 씨는 흙에서 싹을 트기 전 땅 속에 있을 때 벌써 세상에 나가면 다른 것을 감고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다른 식물들도 잎을 내고 자라고 있으나 상추는 모종을 심은 그대로 며칠을 지나더니 조금씩 자라고 있다.

분꽃은 화분 하나에 한 뿌리씩 심어야 한다 해서 다 솎아내고 한 뿌리만 남겨 두었다. 어린 싹들을 뽑아 내버리려 하니 마음이 좀 불편하다. 식물도 어엿한 생명체인데 필요 없다 하여 버리는 것이 마음에 썩 내키지 않는다.

나팔꽃은 막대에 붙어 줄기를 오른쪽으로 감아돌며 벋어 자라고 있다. 네 뿌리 다 약속이나 한 듯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감아 돌고 있다. 나는 살짝 윗 줄기를 풀어 반대 쪽으로 즉, 줄기를 막대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감아 주었다. 어쩌려니 하고 보려는 것이다.

그랬더니 나팔꽃은 다음날 애초의 모습대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감고 있다. 내가 해 놓은 대로 반대로 감고 올라가도 별 지장이 없으련만 구태여 나팔꽃은 처음의 자세를 바꾸지 않는다. 그럴만한, 아니면 그래야 할 무슨 이유 같은 것이라도 있는 성 싶다.

만일 내가 억지로 반대로 감아놓고 실로 묶어 꼼짝못하게 한다면 어찌 될까. 그래서 나는 식물학자도 아닌데 한 뿌리의 나팔꽃을 성가시게 하고 말았다. 나팔꽃을 강제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감고 자라도록 중간중간을 실로 묶어 놓았다. 그래도 허사였다.

실로 감긴 줄기는 그대로 얽매여 있지만 자라나는 줄기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감고 자란다. 나팔꽃은 주어진 본성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고집쟁이다. 자연은 내가 알지 못하는 애초의 약속이나 습성이 있나 보다.

어쨌든 나는 나팔꽃 줄기가 어느 쪽으로 감고 자라나느냐에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나팔꽃들이 피는 모습을 보고 싶을 뿐이다. 그 작은 씨가 땅에 묻혀 있다가 흙과 물과 햇볕의 도움으로 잎을 내어 막대와 줄을 타고 올라가며 꽃들을 피우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놀라운 일이다.

화분에 심어 놓아서인지 길거리나 숲에서 보는 식물들과는 다른 정성과 애정이 솟아오른다. 어린 식물들이 말을 알아듣지는 못하겠지만 나는 ‘빠뜨리지 않고 물을 주고 할 테니 잘 자라라’ 이런 말을 혼잣소리로 해본다. 그 순간 나는 식물도 내가 사랑의 마음을 기울여 주면 필시 내 말을 알아들을 것으로 짐작했다.

물론 나는 분꽃과 상추들에게도 관심을 갖고 보살펴 주고 있다. 나팔꽃은 빨리 자라는 모양이 눈에 뜨여 특별히 지켜본다. 화분에서 식물들이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요즘 내 주요 일과다.

자고 나면 나팔꽃은 성큼 자라나 있다. 그 가는 줄기를 벋으며 오늘 아침엔 줄을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어릴 적 울타리에 올라가 피던 나팔꽃이 생각난다. 나팔꽃은 기댈 것이 없으면 허공에 줄기를 벋어 안타깝게 공중을 감고 돌았다.

나는 화분들에 물을 뿌려주고 흙을 골라주고 하면서 이런 마음이 들었다. 아파트 베란다에 있는 불과 몇 개의 화분에 꽃씨와 모종을 심어 이렇게 애정을 쏟아가며 자라는 모습에 기뻐하고 있는데, 거대한 대자연에 온갖 식물들, 동물들을 내놓은 어느 분이 있다면 그 분은 얼마나 큰 사랑과 기쁨을 가지고 돌보며 날마다 지켜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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