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울물 소리
개울물 소리
  • 문틈 시인
  • 승인 2023.05.06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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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리자 비 온 뒤의 산천은 더욱 짙푸르다. 먼 산은 물안개에 가려 희미하다. 나는 우산을 펴들고 자주 가는 개천으로 나간다. 개천가에 조성된 산책로를 따라 걷는다. 개천을 흐르는 맑은 물소리가 귀를 씻어내듯 청량감으로 넘쳐난다.

저 물소리는 실개천이 시작되는 어느 먼 산맥에서부터 흘러오는 물소리들이 모여 내는 합창이다. 물소리는 암만 들어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잘 들어보면 개천을 흐르는 물은 먼 바다로 가는 설레임에 들떠 무어라 중얼거리는 것 같다.

작은 물소리들이 모여 제법 큰 물소리를 내기도 한다. 나는 귀를 기울여 들어보지만 물소리들이 내는 말뜻을 알아듣지 못한다. 그냥 모든 것은 흐른다는 은유를 떠올릴 뿐이다. 나도 흘러간다는 비유로 환치할 따름이다.

내가 걷는 개천은 제법 큰 편이다. 몇 군데 가로질러 돌들을 이어 놓아둔 징검다리가 있다. 개천 둑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려면 이 돌 징검다리를 건너야 한다. 개천가 산책로를 걷는 즐거움도 크지만 이 징검다리를 건널 때면 말로 다하지 못할 삶에 대한 고양을 느낀다.

한 걸음을 돌 위에 딛고 다른 한 걸음을 앞 돌에 딛고, 이 쪽에서 저 쪽으로 간다. 그 두 발 사이에서 물결이 일며 흘러가는 물소리가 내는 신비스러움을 귀담아 듣는다. 사람살이라는 것도 잘 살펴보면 이 쪽에서 저 쪽으로 건너가는 움직임이 아닌가. 저 쪽은 그리움일 수도 있고, 신비, 영원, 혹은 탐구일 수도 있다.

돌 징검다리를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나는 그 새로운 곳을 향하여 딛는다. 발걸음을 내딛는 돌 사이로 흐르는 물은 먼 바다로 갈 것이지만 지금은 딱 개여울을 지난다. 물살은 폭이 좁고 세게 흐르는 물이 돌에 부딪쳐 돌연 소리를 높인다.

시인 김소월은 개여울을 보며 아름다운 싯귀를 얻었다. ‘홀로 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파릇한 풀포기가/돋아 나오고/잔물은 봄바람에 헤적일 때에’(개여울). 나도 징검다리 돌에 주저앉아서 잔물결을 손으로 움켜본다. 물은 부드럽고 정겹다.

돌 징검다리에 머물러 잠시 움직이지 못하는 내 모습은 너무 바보스럽다. 나이가 들어가는 탓이리라. 세상의 모든 계곡과 개천과 강의 물은 바다로 흘러간다. 바람은 오는 곳 가는 곳이 정해져 있지 않은데 물은 어떤 경로, 어떤 길을 가든 모두 한 곳 바다로 내달린다.

마치 내 몸의 핏줄을 타고 도는 혈액과도 같이. 그렇다. 물은 대지의 생명을 나르는 피다. 물이 돌고 돌아 대지에 푸른 풀을 돋게 하고, 나무에 능금을 열게 한다.

나는 손바닥에 대고 ‘나도 너희를 따라 가고 싶다’고 소리를 묻혀 손을 방금 꺼냈던 개여울에 다시 넣는다. 손이 풀어 놓은 내 말을 물결이 씻어 가라고…. 우산에 듣는 빗소리가 드물어졌다. 나는 우산을 접고 일어나 걷는다. 개천가를 따라서 풀잎들, 골풀, 갈대들이 푸르름을 뽐내고 있다.

김소월은 파릇한 풀포기에 꽂혔는가보다. 푸른 색은 아무리 보아도 물리지 않는다. 만일 모든 나무와 풀과 물이 푸른 색이 아니라 빨간색이었다면 인간이 과연 견뎌낼 수 있었을까. 파릇한 풀포기 하나에서도 우주 만물의 이치를 보는 듯하다.

푸른 색이 아닌 다른 색들은 일시적으로 잠깐 부분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푸른색만이 이 대지를 지배한다. 놀라운 일이다. 푸른 색은 생명의 색깔이다. 북극탐험에 나섰다가 배가 얼음바다에 갇혀 죽게 된 사람들이 죽을 거면 육지를 찾다가 죽겠다며 길을 나섰다가 마침내 쓰러지기 직전 푸른 풀잎 포기를 보고 감격해 하던 장면이 생각난다. 어느 책에서 읽었다.

나는 지금 동서남북이 온통 푸른 빛으로 둘러싸인 속에서 걷고 있다. 생각할수록 경이롭다. 대지에 한바탕 꽃잔치를 치른 봄도 거진 지나가고 있다. 이 비가 그치면 계절은 바야흐로 꽃철에서 잎철로 가게 될 것이다. 이 거대한 순환의 고리 어디 쯤에 나는 서 있다.

산다는 것은 참 아름다운 일이다.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은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개천 물소리를 듣고 단박에 오도송을 읊을 수는 없지만 비 오는 봄길을 걷는 내게는 남모를 기쁨이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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