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34회]-왜군, 서울에서 철수하다
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34회]-왜군, 서울에서 철수하다
  •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4.26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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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3년 2월 12일 행주산성 패전 이후 왜군은 다급해졌다.
명군과 조선군의 포위 속에 마음대로 서울 근교를 돌아다닐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최악의 경우 서울이 무덤이 될 수도 있었다.

여수시 진남관 전경
여수시 진남관 전경

3월 8일에 명나라 경략 송응창은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내용은 (1) 조선에서 완전 철수하고 점령지를 모두 반환할 것 (2) 가토 기요마사에게 포로로 잡힌 임해군과 순화군 등 조선의 두 왕자와 대신들을 석방할 것 (3) 관백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나라 황제에게 사죄할 것의 세 가지 조건을 실행한다면, 명나라 병부는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에 봉하는 계획을 명나라 황제에게 건의하겠다는 것이었다. (송응창 지음·구범진외 7명 옮김, 명나라의 임진전쟁 2 평양수복, p 404-406)

3월 13일에 송응창의 지시를 받은 부총병 사대수는 용산에 있는 왜군 군량 창고 23곳을 불화살을 쏘아서 태워버렸다. 여기엔 1만 4천석의 군량미가 있었는데 고스란히 타버린 것이다.

이러자 고니시는 화친을 원하는 서한을 강화도에 있는 창의사 김천일에게 보내 조정에 전달하도록 했다. 김천일은 이 편지를 류성룡에게 전달했고, 곧 명나라 제독 이여송에게 건네졌다.

이러자 이여송은 심유경을 서울로 보냈다. 3월 15일에 고니시와 심유경의 회담이 서울 용산에서 열렸다. 이 회담에서 조선 대표는 아예 배제되었다.

회담에서 심유경은 큰소리치기를, "상국(上國)이 장차 40만 대군을 몰아 앞뒤에서 차단하여 너희들을 치려 한다. 너희가 지금 조선의 왕자와 배신을 돌려보내고 군사를 거두어 남쪽으로 떠나간다면 봉사(封事)를 성립시킬 수 있고 두 나라가 무사할 것이니, 어찌 온편한 일이 아니겠는가."하였다.

고시시는 봉공(封貢)의 일을 원만하게 처리한 뒤에 서울에서 철수하겠다고 하면서 명나라 사절을 일본에 파견 요청했다. 그러면서 왜군의 안전한 철수를 보장해 보장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러자 경략 송응창은 고니시의 요구를 수락하였다.

3월 25일에 경략 송응창은 선조에게 자문을 보냈다. 조선군이 왜의 잔당을 공격하는 일이 없도록 지시하는 문서였다.
4월 6일에 평안도 관찰사 이원익이 치계하였다.

“송응창이 명군에게 왜적을 죽이지 말 것을 명하고 조선군에게도 교전하지 말 것을 명하였습니다.” (선조실록 1593년 4월 6일)
4월 8일에 강화 회담이 타결되었다. 4월 18일에 고니시는 용산의 창고에 쌓아뒀던 곡식 2만 석을 명군에게 넘겨주고 서울에서 철수했다.

그런데 명나라 장수들이 왜적을 뒤따라가며 엄호해주었기 때문에 조선의 군사들은 감히 왜적을 공격하지 못했다.
심지어 명군은 한강변에 벌려 서서 조선군의 전진을 막아 구타하고, 쇠사슬로 중위 선봉장 변양준의 목을 묶고 땅에 끌어 중상을 입히기도 하였다.
순변사 이빈, 방어사 고언백등도 잡아두어 전진하지 못하게 했다.
이여송은 우격 척금을 보내 노량진의 나룻배를 수거하여 조선군이 도강하지 못하게 했다. 전라도 관찰사 권율이 선봉대로 하여금 왜군을 추격하게 하자, 이여송은 권율을 잡아다가 추궁했다.

이러자 왜군은 조령을 넘으면서 풍악을 울리고 노래 부르고 춤추면서 부산에 도착했다. 1593년 4월 1일의 『선조수정실록』에 나온다.

“경성에 주둔하던 왜장(倭將)들이 군사를 이끌고 남하하여 해상으로 돌아갔다. 송응창(宋應昌)이 막하의 책사(策士)인 사용재(謝用梓)·서일관(徐一貫) 등으로 하여금 중국 사신으로 가장하여 적영(賊營)에 들어가서 행장(고니시) 등을 개유하게 하고, 심유경에게 말하게 하기를, "제독이 파주에 진주하여 유격장 척금(戚金)·전세정(錢世禎)으로 하여금 유성룡(柳成龍) 등을 타이르게 하기를 ‘적을 속여 도성을 나가게 한 연후에 진격하여 섬멸하겠다.’고 하였다 한다." 하였다.

이달 19일에 수가 등이 대군을 철수하여 한강을 건넜는데, 창미(倉米) 2만 석을 남겨 두어 제독의 차관(差官)인 심세현에게 인계하였다. 청정(가토 기요마사)은 두 왕자 및 재신과 중국 관원인 사용재·서일관 두 사람을 데리고 갔으며, 심유경은 처음부터 행장을 따랐다. 여러 적장들은 곧장 조령(鳥嶺)을 넘었는데 도중에서 풍악을 울리고 노래부르고 춤추면서 해상에 이르렀다.”

이처럼 왜군은 단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고스란히 부산에 집결했다.
그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지시에 따라 진주성 공격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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