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오는 봄
처음으로 오는 봄
  • 문틈 시인
  • 승인 2023.03.27 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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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봄은 처음으로 온다. 작년에 왔던 봄이 아니다. 그러므로 올해 봄이 스무 번째 봄이라거나 마흔 번째 봄일 수가 없다. 추운 겨울 내내 산골짜기에 얼어붙어 있다가 바다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잠깨어 흘러가는 강물처럼 봄도 혹독한 겨울의 시련을 견뎌내고 이 땅에 왔다.

처음으로 오는 것은 모두 그렇게 탄생하는 것이다. 아이가 어머니의 탯속에서 열달 동안 생명의 옷을 입는 과정을 거쳐 태어나듯 봄도 그런 조심스러운 준비를 하는 여정을 거쳐 온다.

지금 산과 들을 보라. 온갖 꽃들이 만발하여 눈이 부시다. 복수초, 동백, 매화, 산수유, 목련, 개나리, 진달래, 벚꽃, 철쭉꽃 들이 마치 폭죽처럼 터져나와 피어 있다. 오랜 동안 집안에 웅크리고 있다가 바깥에 나가보니 세상이 온통 봄의 나라다.

나는 저 봄의 추운 내력을 알고 있기에 길거리를 점한 시위대처럼 산야를 뒤덮은 꽃들의 내습에 경악한다. 추운 겨울을 건너온 터라 꽃들은 더 화려하고 더 찬란하다. 꽃들이 마구 피어 있는 거리의 풀과 나무들에 눈길을 주면서 나는 ‘축하한다’, ‘자랑스럽다’고 일일이 꽃들에게 찬탄의 말을 보낸다.

사실 나는 갑작스런 봄의 출현에 당혹감을 느꼈었다. 그럴 것이 나는 오늘도 겨울 점퍼를 입고 나갔었다. 전혀 봄을 맞을 준비가 안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럴 것이 나는 이 땅에 봄이 오는 데에 아무런 기여도 한 것이 없다. 봄이 언제쯤 올 것이라고 생각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봄은 엄청난 선물처럼 내게로 와 보따리를 푼다. 솔직히 부끄럽고 뭔가 겸연쩍기도 하다. 나이가 들수록 계절감이 둔해진다는데 나는 거꾸로 마치 어린아이처럼 놀란 눈을 하고 봄을 바라본다.

천지간에 어마어마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경이에 찬 눈으로 지켜본다. 멀리 걸었다. 노란 안개처럼 나무 주위를 둘러싼 듯한 산수유를 넋을 잃고 마주한다. 이 꽃은 전혀 내색을 하지 않는다. 피었는 듯 만 듯 조용히 피어 있다. 흡사 동안거를 마치고 저자로 나온 선승 같다.

주변 산에는 붉은 진달래가 햇빛을 받아 불타는 듯 반짝인다. 진달래한테는 큰소리로 무어라 말해주고 싶다. 그러나 적절한 말을 찾지 못해 나는 입을 다문다. 모든 봄꽃들에게 나는 통성명을 하여 알은 체를 하고 싶다. 봄꽃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봄이 무슨 일을 벌이려는지 알 것도 같다.

아주 작은 풀꽃도 피어나 바람에 흔들린다. 무슨 큰 일을 저지르려는 것 같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면 저 꽃들의 외침 소리는 무엇이란 말인가! 거리를 막아선 시위대가 큰소리로 외치듯 꽃들도 일제히 무어라 외치고 있다. 나는 그 소리를 듣고 있으나 무어라 하는지는 알아듣지 못한다.

잘 보면 이 땅이 얼마나 봄을 기다렸는지 대번에 알 수 있다. 대지는 봄이 오기 전부터 설레고 있었다. 그러다가 멀지 않는 곳에서 봄 기척이 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푸른 풀잎들을 논두렁 밭두렁에서 솟아내고 빈 나뭇가지마다 도통한 움들을 내밀었다. 대단한 화음이요, 응답이다.

그러더니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지휘봉이라도 본 것처럼 일제히 크레센도(crescendo)의 정점에서 꽃들을 피워냈다. 기적이라고밖에 할 말이 없다. 그렇다. 봄은 기적이다. 아니면 마법사의 주술에 걸린 마술이다.

보자기에서 비둘기를 꺼낸 마술사는 봄의 마법에 대면 아무것도 아니다. 죽은 땅, 마른 가지, 여윈 강을 살아나게 한 부활의 축제를 벌이는 기적에 대면 그렇다. 나는 만일 인생을 두 계절만 살아야 한다고 조물주가 명한다면 겨울과 봄을 추천할 것이다. 우리는 이 땅에 기적을 체험하러, 부활을 체험하러, 왔다고 생각하기에 그렇다.

봄은 왜 오는 것일까. 이런 얼토당토하지 않은 질문을 품은 것은 한 시간도 더 시골길을 걷고 나서였다. 길섶에 푸른 풀잎들이 돋고, 나무마다 꽃들이 피어 있는 사태를 감당할 수가 없어서 나는 그런 질문을 하고 말았다. 그 정답은 모르겠지만 어쩌면 생명은 왜 태어나는 것일까와 같은 질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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