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28회]-부산포 해전 (2)
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28회]-부산포 해전 (2)
  •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 승인 2023.03.09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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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에 조선 연합함대는 왜적의 선봉 대선 4척을 불태워버렸다.
그러자 왜적들은 헤엄 쳐서 육지로 올라갔고, 조선 함선들은 깃발을 흔들고 북을 치면서 장사진(長蛇陣 긴 뱀이 나아가는 모양)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정운 순의비 (부산시 몰운대)
정운 순의비 (부산시 몰운대)

이때, 왜군의 배들은 부산진성 동쪽에 있는 한 산으로부터 5리쯤 되는 언덕 밑 세 군데에 정박해 있었다. 큰 배, 중간 배, 작은 배, 모두 합쳐 470여 척쯤 되었다. 그런데 왜군들은 우리의 위세에 겁을 먹고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

조선 연합 함대는 곧장 앞으로 돌진하여 쳐들어가자 왜선에 있던 왜군들과 산 위의 소굴 속에 있던 왜적들은 모조리 산으로 올라가서 여섯 군데로 나누어서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총알과 화살을 마치 비오듯 우박 쏟아지듯 쏘아댔다. 그런데 편전을 쏘는 것은 조선 사람인 것 같았으며, 대철환도 쏘았는데 그 크기가 모과만하며, 수마석(수마석)을 쏘기도 하였는데 크기가 주발덩이 만한 것이 조선 함선에 많이 떨어졌다.

하지만 조선의 장수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돌진하여 천자포, 지자포, 장군전, 피령전, 장편전, 철환 등을 일제히 쏘아대며 하루 종일 맞붙어 싸워 왜선 100여 척을 때려 부수었다.

왜적들은 토굴 속으로 도망하였다. 조선 함대는 여러 배에서 용사들을 뽑아 육지로 올려보내 왜적을 모조리 섬멸하고 싶었으나, 성 안팎 6, 7군데에 진을 치고 있는 수 많은 왜적들이 말(馬)을 타고 용맹을 과시하고 있었다. 말도 없는 수군을 경솔하게 육지로 보내는 것은 만전의 계책이 아니고, 날도 이미 저물어서 부득이 배를 돌려 한밤중에 가덕도로 돌아와서 밤을 지새웠다.

조선 연합함대는 다음날인 9월 2일에 되돌아가서 왜군을 쳐부술 생각을 하였으나 육지로 올라간 왜군들이 예상보다 많아 조선수군과 육군이 함께 공격하여야만 섬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더구나 풍랑이 거세어 함선이 서로 부딪쳐서 파손된 곳이 있었고 군량도 충분하지 않아 진을 파하고 본영으로 돌아왔다.

부산포 해전은 어느 해전보다 성과가 큰 전투였다. 1592년 9월 17일에 올린 이순신의 장계를 읽어보자.

“그동안 전후로 4차례 출전하여 10번 싸워서 모두 승리하였으나, 장수와 군사들의 공로를 논한다면 이번 부산포 싸움보다 더 큰 것은 없을 것입니다. 이전에 서로 싸울 때는 적선이 많아도 70여 척에 불과했으나, 이번에는 적의 소굴로 들어가 정박하여 있는 470여 척의 왜선 중에서 100여척을 때려 부수어 적들의 간이 떨어지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1592년 8월 1일자 『선조수정실록』은 부산포해전을 그리 높이 평가하지 않고 있다.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적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왜병이 해상의 전투에서 여러 번 패하자 부산·동래에 모여 웅거하면서 전함을 벌여놓고 항구를 지켰다. 이순신이 원균과 함께 수군을 총동원하여 진격하였으나 적이 군사를 거두고 전투에 응하지 않고 높은 곳에 올라가 총을 쏘므로 수군이 육지로 오르지 못하고 빈 배 400여척만 태워버리고 퇴각하였다. 이때 녹도만호 정운이 앞장서서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는데 이순신이 애통해 하였다.”

그런데 『선조수정실록』이 400여 척을 불태웠다고 기록한 것은 지나친 과장이다. 100여 척이 맞다

한편 녹도만호 정운이 부산포 해전에서 전사한 것은 큰 손실이었다.

이순신은 1592년 9월 11일에 정운을 이대원의 사당에 배향하기를 청하는 장계를 올렸고 조정은 이를 받아들여, 정운은 고흥 쌍충사에 배향되었다. 이후 정운이 병조참판에 추증되자 이순신은 손수 제문을 지어 제사를 지내 주었다. 한편 부산시 사하구 다대동 몰운대에는 정운 장군의 충절을 기리는 순의비가 세워져 있다.

아울러 이순신은 장계에서 사상자를 일일이 적었다. 전사자는 5명(방답 1호선 1명, 여도선 1명, 사도 3호선 1명, 본영 한후선 2명)으로 철환에 맞아 전사하였다.

부상자는 25명으로 본영 지휘선 3명, 본영 한후선 3명, 본영 거북선 2명, 여도선 2명, 사도 1호선 4명, 흥양 1호선 1명, 본영 우후선 1명, 방답 1호선 2명, 방답 거북선 3명, 보성선 1명 등 22명은 철환을 맞았고, 본영지휘선 1명, 방답 거북선 2명 등 3명은 화살을 맞았으나 중상에 이르지 않았다. 여기에서 눈 여결 볼 것은 방답 거북선의 부상자가 5명이나 된 것이다.

부산포해전으로 조선 수군은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였고, 일본의 수륙병진 전략은 완전히 무너졌다. 부산시는 부산포 해전 승전일인 양력 10월 5일(음력 9월 1일)을 ‘부산 시민의 날’로 지정하여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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