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덮인 나라
눈에 덮인 나라
  • 문틈 시인
  • 승인 2022.12.23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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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 벨 소리가 울린다. 새벽 6시다. 보통 나는 이 시각에 아침 식사를 하는데 오늘은 마냥 침대에 누워 있고 싶었다. 휴대폰을 집어들고 버튼을 누르니 멀리 사는 아들이 “아빠, 눈이 왔어요. 빨리 나가서 눈을 뭉쳐 멀리 던져 보세요.” 그러면서 “온통 세상이 동화 속 나라 같아요.” 한다.

아들은 눈이 세상을 하얗게 덮은 이 아침 어서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보라 한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해맑은 어린 시절로 되돌아 가볼 수 있겠느냐며 사진도 찍고 하라며 혼자 신이 나서 나를 채근한다.

아들은 내가 요즘 기분이 저조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눈 소식 전해 주어 고맙다” 하고는 일어나 옷을 주섬주섬 입고는 진짜로 밖으로 나간다. 나는 침대를 벗어나는 것이 싫었지만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났다. 혼자 사는 아들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다.

솔직히 이 장면에서 아들에게 거짓말로 밖에 나가 눈을 뭉쳐 던져 보았다 하면 그만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어쩐지 그런 거짓말을 못할 것 같다. 아니, 눈으로 덮인 새하얀 이 아침에 그런 거짓말을 하면 죄를 범하는 일이 될 것 같다.

해서, 나는 아직 사람들의 발자국이 없는 눈길에 쌓인 눈을 뭉쳐서 몇 걸음 굴려 커진 눈뭉치를 보고는 정말 동심이 되는 같았다. 대체 몇 년 만이냐. 까마득히 먼 옛날의 어린 내 모습을 떠올려 보며 있자니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나무며, 울타리, 계단, 인도, 산길, 모든 물상이 하얀 눈으로 덮여 있다.

눈은 마치 ‘괜, 찬, 타, ……/괜, 찬, 타, ……/괜, 찬, 타, …… ‘(서정주)라고 속삭이듯 내려 세상을 덮고 있다.

이렇게 눈이 수북이 내린 날이면 세상은 온통 동화의 나라가 되고, 그 나라에는 국경선도, 철조망도 없는 온 천하가 한 나라가 되어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내가 북쪽으로 한없이 눈길을 걸어간다 해도 오늘은 아무도 나를 가로막지 않을 것이다.

눈에 덮여 모든 나라가 총부리를 내리고 한 나라로 세상이 통일되어 있으니 여권 같은 것도 필요 없을 것이다. 나는 하늘의 축복과도 같은 눈 온 날 아침 이 눈의 나라에서 내 마음이 한없이 정갈해지는 것을 느낀다.

어제까지도 한해가 다 가는 데 대한 우울감이 나를 옥죄고 있었는데 하늘이 지상을 감싸 안는 이 거룩한 풍경 속에서 나는 잠시 설국의 시민이 되어 바라본다. 산, 들, 길, 나무, 담장, 굴뚝, 만상이 수북이 눈에 쌓인 모습을 보면 온갖 괴로움, 고통, 슬픔 들이 다 사라져 버리는 것 같다.

올 한해 설령 이룬 것이 없다 한들, 덧없이 한 해가 간다고 아쉬워한들, 그게 다 눈 온 날 아침 무슨 대수냐. 절대한 아름다움이 나를 이렇게 감싸 안고 있는데, 나는 눈처럼 하얀 백지 같은 선한 마음이 된다.

나는 다시 눈뭉치를 굴린다. 마치 북으로 가는 길을 따라 백두산까지라도 굴려 갈 것처럼. 내 상상은 눈뭉치는 점점 커져가고 마을을 지날 때마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사람들이 나와서 나와 함께 커다란 눈뭉치를 굴려 가는 모습을 그려본다. 사람들이 그렇게 한 마음이 될 수는 없을까. 눈뭉치를 모두 함께 세상 끝까지 굴려 가는 하얀 마음이 될 수는 없을까.

올 한 해 동안 코로나, 우크라이나 전쟁, 경제불황으로 사람들은 참 많이도 우울하게 살았다. 돌아보면 어느 핸들 태평성대한 시기가 있었던가.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해마다 힘든 나날을 보낸다. 인생은 늘 고통 속을 헤쳐가는 장애물 경기 같은, 극한 직업 같은 것이라 해도 다툴 말이 없다.

그런 사람들에게 눈에 덮인 세상은 한해의 아픔, 슬픔을 덮어주는 위로의 세계다. ‘이 좋은 아침/우리들은 다같이 아름다운 생각을 합시다.’(노천명) 눈뭉치를 굴리며 생각하노라니 살아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복락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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