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20회]-한산대첩(2)
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20회]-한산대첩(2)
  •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 승인 2022.12.20 14: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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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7월 8일 이른 아침에 이순신은 배를 띄웠다.
한 바다에 이르니, 일본의 척후선으로 보이는 대선 1척과 중선 1척이 조선함대를 발견하고 도망쳤다.

한산도 한산문
한산도 한산문

조선함대가 추격하니 미륵도 목동 김천손의 말처럼 일본 함대 73척(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이 머무르고 있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1554~1626)가 단독 출전한 함대였다.
용인전투에서 전공을 세운 와키자카는 공명심에 빠져, 쿠기와 가토를 놔두고 단독으로 견대량으로 이동한 것이다.
견내량은 지형이 매우 좁고 암초가 많아 판옥선이 서로 부딪치게 될 것 같아 싸움하기가 곤란하였다. 그래서 이순신은 한산도 바다 한가운데로 끌어내어 섬멸할 계책을 세웠다.

그런데 원균은 곧장 대적하여 격파하려 하자 이순신은 ‘넓은 바다로 유인해 내어 격파해야 한다.’ 하였다. 그러나 원균이 듣지 않자, 이순신이 말하기를 ‘공은 병법(兵法)을 이처럼 모른단 말인가.’ 하였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7월1일 )

이순신은 먼저 판옥선 대여섯 척으로 선봉으로 나온 적선을 뒤쫓아서 공격할 기세를 보이게 하니, 왜선들이 일시에 돛을 올려 쫓아 나왔다. 조선 배가 거짓으로 물러나면서 돌아나오자, 왜선들은 줄곧 뒤쫓아 나왔다.
일본 수군이 바다 한 가운데로 나오자, 이순신은 여러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학익진(鶴翼陣 학의 날개가 깃을 펴는 모양의 진법)'을 펼쳐 일시에 진격하여 각각 지자 · 현자 · 승자총통들을 쏘아 두세 척을 깨뜨렸다. 이러자 왜군들은 사기가 꺾이어 도망치려 하였다.

여러 장수와 군사들이 승리한 기세로 흥분하며 앞다투어 돌진하면서, 화살과 화전을 잇달아 쏘았다.
천부사 권준이 가장 먼저 돌진하여 왜의 층각대선 1척을 쳐부수어 왜장을 비롯하여 머리 10급을 베고 조선 남자 1명을 산 채로 빼앗았다.

광양현감 어영담도 왜의 층각대선 1척을 쳐부수어 왜장과 왜적 머리 12급을 베었다. 사도첨사 김완은 왜 대선 1척을 쳐부수고 왜장을 비롯하여 16급을 베었다. 흥양현감 배흥립이 왜 대선 1척을 쳐부수고 왜적 머리 8급을 베고 또 많이 익사시켰다.

방답첨사 이순신은 왜 대선 1척을 쳐부수어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잡아 머리 4급을 베었는데, 다만 사살하기에만 힘쓰고 머리를 베는 일에는 힘쓰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 두 척을 쫓아가서 깨뜨리고 일시에 불태웠다.

좌(귀선)돌격장 급제 이기남은 왜 대선 1척을 쳐부수어 바다 가운데서 잡아 머리 7급을 베었다. 좌별도장이며 본영 군관인 전 만호 윤사공과 가안책 등은 층각선 2척을 바다 가운데서 사로잡아 머리 6급을 베었다.

사진 2 한산도 제승당

낙안군수 신호는 왜 대선 한 척을 바다 가운데서 사로잡아 머리 7급을 베었고, 녹도만호 정운은 층각대선 2척을 총통으로 뚫자 여러 전선이 협공하여 불태우고 머리 3급을 베고 조선 사람 2명을 산 채로 빼앗았다.

여도권관 김인영은 왜 대선 1척을 쳐부수어 바다 가운데서 사로잡아 머리 3급을 베었다. 발포만호 황정록은 층각선 1척을 여러 전선과 협공하여 힘을 모아 깨트리고 머리 2급을 베었다.

우별도장 전 만호 송응민은 머리 2급을 베었고, 흥양통장 전 현감 최천보는 머리 3급을 베었으며, 참퇴장 전 첨사 이응화는 머리 1급을 베었다. 우(귀선) 돌격장 급제 박이량은 머리 1급을 베었고, 이순신의 타고 있는 대장선에서는 머리 5급을 베었다.
유군일령장(遊軍一領將) 손윤문은 왜 소선 두 척에 총을 쏘고 산 위에까지 추격하였고, 오령장(五領將) 전 봉사 최도전은 조선 소년 3명을 산 채로 빼앗았다.

나머지 왜 대선 20척, 중선 17척, 소선 5척 등은 좌·우도의 여러 장수들이 힘을 모아 불살라 깨뜨렸으며, 화살을 맞고 물에 빠져 죽은 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이에 왜인 400여 명은 배를 버리고 한산도 육지로 올라갔다. 왜장 와키자카 야스하루도 한산도에 고립되었던 패잔병이 되어 수일간 미역으로 연명하다가 겨우 달아났다.

한편 대선 1척·중선 7척·소선 6척, 총 14척은 접전할 때 뒤처져 있다가 멀리서 배를 불태우며 목 베어 죽이는 꼴을 바라보고는 노를 재촉하여 도망해 버렸다.
하지만 조선 수군은 종일 접전한 탓으로 장수와 군사들이 피곤하였고 날도 어두워 견내량 내항에서 진을 치고 밤을 지냈다. ,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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