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 [18회]-선조, 요동 망명을 꾀하다.
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 [18회]-선조, 요동 망명을 꾀하다.
  •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 승인 2022.11.21 15:1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592년 6월 중순, 2차 출전에서 돌아온 이순신은 사천 전투에서 부상 당한 치료를 하면서 전황(戰況)을 예의주시했다.

여수 이순신 광장
여수 이순신 광장

그러면 임진왜란 전황을 살펴보자.

5월 3일에 고니시 유키나가가 서울에 무혈입성했다. 4일에 가토 기요마사도 서울에 들어왔다. 5월 16일에 가토로부터 서울 함락과 조선 국왕의 도망소식을 접한 히데요시는 9개 조에 걸친 지시를 내렸다.
여기에는 조선 국왕을 수색하여 찾아낼 것, 조선 농민에게 군량을 징발하여 명나라 원정 준비를 든든하게 할 것, 서울에 히데요시의 거처를 준비할 것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왜장들은 조선 전역을 재배치하고 징발한 군량을 정하였다.

# 6월 15일에 왜군 평양 점령

5월 10일에 고니시와 가토의 군대는 임진강 변에 이르렀다. 임진강에는 김명원과 이양원 그리고 한응인의 군대 1만 3천 명이 대치중이었다. 그런데 가토의 군대는 짐짓 철수하는 척 했다. 이러자 5월 17일에 한응인과 김명원의 군대가 가토의 군대를 공격하다가 크게 패했다. 임진강 방어선이 무너진 것이다. 5월 27일에 왜군은 임진강을 건넜고 29일에 개성이 함락되었다.

6월 11일에 선조는 도망치듯 평양을 빠져나갔고, 6월 15일에 왜군은 평양성을 쉽게 점령했다.

# 어이없이 패배한 용인 전투

6월 6일에 전라도 관찰사 이광, 충청도 관찰사 윤국형, 경상도 관찰사 김수가 이끄는 5만 명의 조선군이 경기도 용인 광교산 전투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끄는 1,600명의 왜군에게 어이 없게 패했다.

6월 5일에 백광언 등은 문소산에 있는 왜적에게 총공세를 퍼부어 왜적 10여 명을 베었지만 왜군은 전혀 대응하지 않았다. 이 날 서울에서 내려온 일본의 구원병 1천 명이 용인 부근에 나타났다.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수군이었다.

밤이 되자 왜적은 백광언의 군사가 차츰 해이해졌음을 알고 불시에 숲속에서 나와 일시에 칼을 휘두르니 백광언과 이지시가 달아나면서 죽었다. 이어서 고부 군수 이윤인, 함열 현감 정연 등도 피살되자 나머지 군사들은 기세가 크게 꺾였다.

6월 6일 아침 광교산에 진을 친 조선군의 밥 짓는 연기가 올라갈 때 왜군이 갑자기 산골짜기를 따라 기습했다. 흰 말을 타고 쇠가면을 쓴 장수가 수십 명을 데리고 칼날을 번뜩이며 앞장서서 들어오자, 충청 병사 신익은 선봉으로 앞에 있다가 왜적의 위세에 놀라 먼저 도망갔다. 이러자 5만명의 군사가 일시에 다 흩어졌는데, 그 형세가 마치 산이 무너지는듯하였다.

이광·김수·윤국형은 30리 밖에 있었지만 역시 진을 정돈하지 못하고 군량과 군수품을 모두 버린 채 도주했고, 왜적은 횃불 하나로 그것들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이 패전책임으로 이광은 파직당했고 7월 8일에 이치전투에서 승리한 광주목사 권율이 전라관찰사가 되었다.

# 선조, 요동으로 망명을 계획하다.

6월 13일 영변에 도착한 선조는 국정 권한을 세자 광해군에게 넘기고 자신은 요동 망명을 결심했다. 14일에 선조는 망명 의사를 밝히는 외교문서를 명나라 요동 도사에게 보냈다.

그런데 6월 18일에 요동 도사는 선조가 진짜 임금인지를 확인했다. 왜냐하면 왜군이 가짜 왕을 세워서 요동에 진입한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명나라 병부도 선조가 왜적을 만나자마자 도주한 것은 이상한 일이라면서 조선이 일본의 길잡이가 아닌지 하는 의구심을 계속 표명했다. 결국 선조는 진짜 조선 왕인지 아닌지를 확인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6월 22일에 의주에 도착한 선조는 신하들에게 요동행을 독촉했다. 이러자 류성룡과 윤근수가 극력 말렸다. 6월 24일에도 선조는 요동행을 재촉했다. 그런데 명나라가 선조가 망명하면 관전보(寬奠堡)의 빈 관아에 안치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관전보는 압록강 건너편 지금의 단동에 여진족을 막기위해 명이 쌓은 작은 성이었다. 이러자 선조의 망명 소동은 잠잠해졌다. (선조실록 1592년 6월 26일)

의주에서 선조는 다음 시를 지었다.

관산에 뜬 달 보며 통곡하노라

압록강 바람에 마음 쓰리도다

조정 신하들은 이 날 이후에도

서인이니 동인이니 나뉘어 싸움을 계속할 것인가

선조는 당쟁 탓, 신하 탓이다. 참 한심한 임금이었다.

한편 평양성을 점령한 고니시는 선조에게 비아냥 거리는 편지를 보냈다.
“수군 10만여 명이 서해로부터 오고 있는데 대왕의 행차는 장차 어디로 갈 것이요?”(유성룡 지음·이민수 옮김, 징비록, p161)                                                               김세곤<‘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