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간다
가을이 간다
  • 문틈 시인
  • 승인 2022.11.18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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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나 여름은 계절이 왔다가 가는 경계가 분명치 않지만 가을은 뒤끝이 아주 분명하다. 가을은 열매들을 익게 하고 잎새들에 가을물을 들여놓고 떠나갈 채비를 한다. 붉고 노랗고 밤색으로 색색으로 물든 잎새들은 한동안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다가 가을의 재촉을 받고 낙엽이 되어 우수수 떨어진다.

이윽고 가을이 떠나면 그 자리는 텅 비어 있다. 마치 새가 새끼가 성장하자 함께 둥지를 비워 놓고 떠난 모습처럼. 나무들은 일제히 잎새들을 다 떨구고 벌거벗은 모습이 되어 서 있다. 숲에는 갑자기 맨몸이 된 나무들이 웅크린 채 서 있는 것이다.

나무들이 벌거벗은 나목으로 서 있는 모습들을 보고 있노라면 처연한 생각이 든다. 가을은 대체 무슨 짓을 저질러 놓은 것일까. 가을의 목적은 열매들을 익게 한 것이었으므로 이제 잎새들은 더 이상 필요 없다는 것일까. 가을의 행보를 지켜보면서 나는 가을이 저지른 일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렇건만 나무들의 옷이나 다름없던 그 무성한 잎새들을 죄다 떨어뜨려 놓고 가는 뒷모습은 차갑고 무정하게만 보인다. 다시 안볼 것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을은 할 일을 다 마쳤다는 듯 훠이훠이 산마루를 넘어 간다.

사물을 인생사와 비유하기를 좋아하는 나는 이런 가을의 모습에서 사람에게도 사계절의 흐름이 있는 것인 양 빗대본다. 인간에 비유하자면 결혼해서 자식들을 낳고 기르고 여의고 직장에서 은퇴하고 난 지금의 내 모습이 흡사 가을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인생에도 언젠가는 가을이 오고 그리고 언젠가는 그 가을이 떠날 때가 있을 것이라는.

가을의 포인트는 열매에 있다. 가을이 공들여 이룩한 열매는 말하자면 대를 이어갈 후손이다. 가을은 봄부터 시작된 후손 만들기 프로젝트의 가장 정점에서 마지막 노고를 다 바친다. 익은 열매는 씨앗을 품은 모양으로 땅에 떨어져 흙에 묻혀 싹을 틔우고 자라나 나무가 된다.

그러면 나무에게 또 후손을 만들어 주기 위해 하늘과 땅의 합작 공사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해마다 이 대공사는 어김없이 진행된다.

가을은 위대한 작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한다. 영락없이 인간사의 그것에 방불하다. 인간의 삶을 사계절로 나누고 자연의 계절에 빗대보라. 자연의 이치에 인간의 여정은 딱 들어맞는다. 오고 가고, 또 오고 가고. 가을은 생명의 연쇄, 순환의 그림을 아주 선명하게 보여 준다.

그러니까 인간도 저 가을이 벌려 놓고 떠나는 모습에서 자신이 이 세상에 왔다가 가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왜 사냐고 묻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사실상 한해의 끝이라고 봐야 할 가을이 모든 질문에 대답한다. 나도 언젠가는 가을 열매처럼 뚝 떨어져 새로운 나무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

세상 모든 사물은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되어 있다. 가을이 사물을 흙, 물, 불, 공기로 분해하면 자연은 다시 이것들을 조립하여 새 생명을 만들어낸다. 부활이라고 할 수는 없을지라도 다른 생명의 원소로 재조합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윌리엄 워즈워드는 쓴다. “우리집 바람벽은 할아버지 할머니의 살이라”고.

불멸이라는 말은 이런 뜻으로 고쳐 생각해볼 수 있다. 이 천지간에 우주의 모든 것은 사라지되 영영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습으로 태어난다. 가을의 모습을 깊이 궁구해보면 그런 긴 이야기를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리가 원소들로 분해되었다가 다시 재조립되어 나타나는 우주 신비의 과정에 참여한다는 것은 경이롭다.

내가 마시는 공기, 내가 딛고 걸어가는 흙, 마시는 물, 그리고 몸을 움직이는 기운. 이 모든 신비는 대자연의 입장에서 볼 때 열매를 만들어가는 커다란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나는 그 소재로 쓰일 뿐.

가을은 그런 의미와 색채가 분명하다는 점에서 타 계절에 비해 압도적인 위상을 보여 준다. 나는 이 가을이 가는 것을 보며 천지가 운행하는 사업의 목표를 달성하고 떠나는 위대한 계절의 모습을 본다. 분명히 사람들에게도 각자의 위대한 가을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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