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낙엽이 진다
오, 낙엽이 진다
  • 문틈 시인
  • 승인 2022.11.11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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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산홍엽(滿山紅葉)이라는 말대로 천지는 온통 찬란한 가을물이 들어 화려강산이다. 푸른 봄빛으로 시작한 계절은 이제 그 힘을 다하여 가을 붉은빛으로 타오르고 있다. 흡사 대자연이 계절의 잔치를 벌이는 모양 같다.

분명코 가을은 시방 무슨 일을 저질러 놓고 저렇게 불붙는 듯 절정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누군가가 ‘천지에 대고 불이야!’ 하고 큰소리라도 내질렀던 말인가. 이 황홀한 느낌을 무엇이라고 하면 좋을까. 만국기가 펄럭이던 초등학교 운동회장의 광경이 겹쳐 떠오른다.

축제 분위기에 들떠 마른 오징어를 먹고 채여 잔뜩 기대했던 기마전에 나가지 못해 운동장 가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었던 장면. 그때 운동장은 고함소리가 진동하고 그 속에 엉엉 울고 있던 어린 한 소년은 축제를 울고 있었다.

한해를 마감하는 축제를 이리도 성대히 연출하는 자연에 그저 감격하여 나는 흐느껴 울고 싶을 따름이다. 이 가을 축제가 끝나고 나면 만상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것이다. 낙엽들이 떨어지는 아름다운 배경에는 필시 내년 봄 다시 시작할 거대한 계획이 숨어 있음을 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상상을 현실로 보려면 겨울을 지나야 한다. 춥고 어둡고 삭풍이 부는 오랜 겨울. 이렇게 지금 계절은 한해의 끝에 당도했다. 한해의 파장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길래 낙엽들은 바람의 손에 이끌려서 어딘가 끝으로 몰려간다. 해남 대흥사에서 어느 해 늦가을 밤, 낙엽 구르는 소리에 잠을 못이루다가 달빛이 환한 가람에 나가보고 깨달음을 얻었다. 낙엽은 이승의 끝으로 굴러가서 흙이 되고, 모든 육체는 시들어 사라진다는 것을.

그러나 영영 깨닫지 못한 것이 있으니 무엇인가 나로 하여금 낙엽의 행로를 따라가 울지 못하게 한 것인지. 나는 누구인가를, 무엇인가를, 뜬눈으로 밤을 밝혀도 더욱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은 분명 낙엽 구르는 소리가 죽고 싶을 만큼 내 마음을 건드렸던 탓이다.

그 모든 것은 낙엽이 바람따라 굴러가는 소리 때문이었다. 그 소리. 이승에서 저승으로 굴러가는 죽은 이들의 서늘한 발자국 소리였던가. 이 늦가을 나는 까닭없이 어딘가로 훨훨 떠나고 싶다. 가지에 붙어 있던 잎새들이 낙엽이 되어 끝을 향해 굴러가듯이 세상 끝을 향해 떠나고 싶다.

칸트는 자기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에 대해 잘 설명했다고 한다. 마치 여행을 갔다 온 사람처럼. 나는 내가 직접 발을 디뎌보지 않고서는 파리에 대해 말하지 못한다. 손에 쥐어 주어야 인식한다. 그것은 슬픈 일이다. 낙엽은 언제 나뭇가지로부터 떨어져가야 하는지를 안다. 스스로 아는 것 같다.

놀라운 것은 낙엽은 떨어져 다시 흙이 되고 거름이 되어 나무뿌리를 감싸 안는다는 것. 이 불가해한 대목에서 나는 결코 진화론자가 될 수 없다. 흙이 되고 나서도 다시 봄을 준비하는 낙엽이라니.

이 신비한 연쇄고리를 자연선택이나 돌연변이로 도무지 설명이 닿지 않는다. 그리고 낙엽이 저토록 화려하게 허공을 쥐고 흩날리는 아름다움을 느끼는 내 느낌을 어떻게 진화론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시몬, 나뭇잎새 떨어진 숲으로 가자./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구르몽은 마치 울먹이듯 쓴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가까이 오라, 우리도 언젠가는 낙엽이리니/가까이 오라, 밤이 오고 바람이 분다.’

감상어린 싯귀이지만 못내 내 마음을 촉촉이 적신다. 그렇다, 낙엽지는 풍경이 모든 것을 말한다. 내가 오래 품고 있었던 생과 사의 의문을. 그러나 나는 무어라 말로 답할 수가 없다.

어느 분이 있어 헤아리고 있을 것이다. 만산에 지는 가을 낙엽의 숫자를 하나하나 다 헤아려 품어 주고 있을 것이다. 잎, 잎, 모든 잎들은 가을에게 영광을 바치고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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