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
가을비
  • 문틈 시인
  • 승인 2022.10.06 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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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에 비가 내린다. 어제, 오늘 내리더니 내일도 온다 한다. 이 비 그치면 산에는 단풍에 더욱 고운 물이 들고 낙엽들도 우수수 떨어질 것이다. 가을비는 인생을 위로하지 않는다. 슬픈 일이 있으면 슬퍼하라고 하는 듯하다. 그 빗소리가 듣고 싶어 우산을 펴들고 산책을 나선다.

우산 위에 몰려와 자잘하게 부서지는 빗소리. 언제였던가, 날을 받아 흐느껴 울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그냥 힘들게 살아온 내 인생을 속으로 울어주고 싶어서였던가. 우산에 듣는 빗소리가 가슴을 싸안하게 한다.

가을 빗소리는 처연하다. 쓸쓸하다. 나는 빗속으로 길을 따라 지향 없이 걷는다. 길가의 풀들은 빛이 바래고 낙엽들도 한 잎 두 잎 떨어진다. 늘 가던 숲의 오솔길로 들어선다. 길바닥에 도토리, 밤들이 떨어져 있다.

나는 그 젖은 열매들을 몇 알 주웠다가 멈춰 서서 들여다보고는 도로 놓아둔다. 위대한 결실이다. 폭풍우와 천둥 번개를 이겨내고 단단히 여물어 마침내 열매가 되는 힘든 여정을 생각해본다. 나무의 목표는 열매였다. 떨어진 열매들은 땅에 묻혀 새싹을 트고 어린나무로, 큰나무로 자라나 또다시 열매를 맺을 것이다.

끊임없는 이 연쇄의 고리. 나무며, 새며, 풀이며, 가을은 생명체의 후손을 이어갈 씨앗을 맺고는 저문다. 그렇게 숲은 올 한해의 수고를 마감하고 그 결과물들을 내놓는데, 내 마음은 가을비 소리에 잠겨 온갖 상념의 고리를 잇는다. 흔히 감상을 경계하라지만 사시사철 언제나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만 살 수는 없는 일. 이렇게 가을비 오는 날엔 세상 시름 다 내려놓고 나를 내버려 두고 싶어진다.

저녁에도 비는 추적추적 내린다. 비 오지 않는 계절이 없건만 가을비처럼 마음을 파고드는 비도 없다. 가을 빗줄기 사이로 떠났던 나의 상념은 좀체 돌아올 줄 모른다. 이제 잠자리에 들어야 할 참인데 나는 베개를 고쳐 베며 배의 이물에 철썩이는 물결처럼 뒤척거린다.

나는 빗소리를 고이 귀에 담아 둔다. 가을엔 편지를 쓰겠어요, 하는 노래가 있었던가. 그런 심정으로 마음 한 귀퉁이를 열어본다. 아내를 만나고, 자식들을 낳고, 가족으로 살면서 일평생 무거운 책임감을 지고 살았다. 이것이 사는 것이려니 했다.

그런데 가을비는 또 다른 것이 있다고 속살거리는 것 같다. 하지만 내겐 가족을 넘어설 용기는 없었는가 싶기도 하다. 뭐, 그럴만한 목표를 찾지 못하기도, 용기도 없었다. 한때는 산사에 가서 지낼 궁리도 해보았다. 한때는 독신으로 살 생각도 해보았다.

이 길도 저 길도 날 오라 했지만 나는 선뜻 나설 수가 없었다. 나는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궁극의 답을 찾아내지 못했다. 상수리나무가 도토리를 맺어 한해를 마감하듯이 나의 종착지도 가족에 머문다. 지금 이 시간 아내는 저쪽 방에서 하마 잠이 들었을까.

가을비는 그침없이 내리고 그 속으로 떠나간 내 상념은 그렇게 비에 젖은 채로 돌아오지 않는다. 가을밤은 깊어만 간다. 억척스레 단단히 무장을 하고 살아왔던 내 마음이 이리도 쉽게 가을비에 틈을 내주는 것은 인생의 쓴맛단맛을 다 보아서인지도 모른다.

가을비는 너무나 많은 생각들을 데려 온다. 한해는 사실상 가을로 끝이다. 겨울은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의 잠, 떨어진 씨앗들의 잠을 땅 속에 품을 따름이다.

아무래도 가을이란 자아 속으로 침잠하여 지금껏 살아온 깊이를 재보라는 계절인가보다. 이것이 내가 가을비소리를 들으며 생각해낸 덧없는 한 문장이다. 갑자기 머리맡에 놓아둔 휴대폰에 진동음이 난다. “지금 주무시는 거에요?” 건넌방의 아내로부터 온 메시지다.

그러니 가을비가 마음을 건드린다고 홀로 우산을 받쳐 들고 가로수길을 이리저리 헤맬 필요는 없는 일이다. 그러기에는 청춘이 다하였고, 나는 시방 내 잠 속으로 내려가는 중이니. 이 구슬픈 비는 언제쯤 그치려나.

“열심히 살아온 당신, 이제는 마음 홀가분하게 쉬세요.” 핸드폰 문자들을 보는데 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한 알 열매의 낙하를 기다리는 내 마음 속으로 가을비 오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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