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 - 14회 사천 해전
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 - 14회 사천 해전
  •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 승인 2022.09.26 15: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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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옥포 승첩 이후에도 부산에 본거지를 둔 일본 수군은 노략질을 그치지 않았다. 왜군은 점점 거제도 서쪽으로 침범하여 연해안의 고을들을 분탕질하였다. 이런 소식이 이순신에게 계속 전해졌다. 마침내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이억기에게 6월 3일까지 전라좌수영에 집결하여 함께 출전하자는 공문을 보냈다.

그런데 5월 27일에 원균이 이순신에게 긴급 구원 요청 공문을 보냈다.

“일본 군선 10여 척이 벌써 사천과 곤양 등지로 육박하여 들어오고 있습니다. 경상우수군의 전선들은 남해 노량으로 이동했습니다.”

사천과 곤양은 남해 접경이었고, 남해는 광양과 여수 인근이었다. 왜군이 전라좌수영 턱밑까지 온 것이다.

이순신은 초조했다. 지체하다가는 큰 화를 초래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이순신은 6월 3일까지 전라우수사 이억기를 기다릴 수 없었다. 이순신은 휘하의 함대만으로 출전키로 하고, 전라좌수영을 지키는 유진장으로 군관 윤사공을 임명하고, 조방장 정걸을 전라좌수영 들머리인 흥양에서 전라좌수영을 지휘하도록 했다.

이순신은 각 부서와 장수를 다음과 같이 임명했다.

중위장 순천부사 권준

중부장 광양현감 어영담

전부장 방답첨사 이순신

후부장 흥양현감 배흥립

좌부장 낙안군수 신호

우부장 보성군수 김득광

좌척후장 녹도만호 정운

우척후장 사도첨사 김완

좌별도장 우후 이몽구

우별도장 여도권관 김인영

한후장 전 군관 고안책·급제 송성

참퇴장 전 첨사 이응화

귀선(龜船) 돌격장 급제 이기남 ·보인 이언량

5월 29일 새벽에 이순신은 판옥선 23척을 이끌고 노량으로 향했다. (1차 1차 출전 시 24척보다 1척이 준 것은 송한련이 옥포 승첩 장계를 가지고 평양으로 올라갔기 때문이다) 전라우수사 이억기에게는 사정을 이야기하고 곧바로 뒤쫓아 오라는 편지를 보냈다.

이윽고 이순신은 노량 앞바다에 도착했다. 이때 원균은 하동 선창에 옮겨 있다가 단 3척의 전선을 이끌고 노량에서 합세하였다. (원균의 함선이 1차 출전 시 4척에서 3척으로 1척이 준 것은 원균이 옥포 승첩 장계를 가지고 평양에 갔기 때문이다.)

이순신이 원균에게 왜적의 행방을 상세히 묻고 있을 때, 곤양 쪽에서 사천으로 왜선 1척이 달아나고 있었다. 연합함대가 뒤쫓아 가자 왜군은 상륙해 버렸다. 방답첨사 이순신과 남해 현령 기효근이 대포를 쏘아 왜선 1척을 불살랐다.

이 과정에서 사천 선창(사천시 읍남면 선진리성 부근)에 왜선 12척이 정박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왜군 400여 명은 배를 정박시키고 지세가 험한 절벽 위에 뱀이 똬리를 뜰 듯 장사진(長蛇陣)을 치고 있었다.

그런데 조류가 썰물이어서 판옥선이 개펄에 박힐 수도 있어 진입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에 이순신과 원균의 연합함대는 유인작전(誘引作戰)을 썼다. 조선 함대가 뒤로 물러가자 왜군은 유인작전에 말려들지 않고 산에서 내려와 총을 쏘고 함성을 지르며 날뛰었다.

이럴 즈음에 조수가 밀물로 바뀌어 판옥선이 포구로 들어갈 수 있게 되면서 이순신에게 유리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에 이순신은 처음 출전한 거북선을 앞세워 돌격작전을 펼쳤다. 거북선 돌격장 이기남이 적선 속으로 먼저 달려 들어가 천·지·현·황자포(砲) 등의 각종 총통(銃筒)을 쏘니 일본 수군들은 놀라서 혼비백산하였다. (그런데 725만 명이 본 김한민 감독의 한산-용의 출현’ 영화 첫 부분에는 나대용이 사천해전에서 거북선 돌격장으로 나오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나대용은 이순신과 함께 지휘선을 탔다.)

뒤따른 전선들도 일제히 철환(鐵丸)과 장편전(長片箭) 천자·지자 총통 등을 쏘아 일본 대선 12척을 분멸하였다. 이 전투에서 김완은 소녀 1명을 구했고, 이응화는 왜군 머리 하나를 베었는데 왜군들은 멀리서 바라보고 울부짖고 발을 동동 구르며 대성통곡하였다.

하지만 이순신 함대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무엇보다 이순신 자신이 앞장서서 독전하다가 왼쪽 어깨에 총탄이 관통하는 총상을 입었고, 대솔군관 훈련 봉사 나대용은 철환을 맞았고, 전 봉사 이설도 화살을 맞았으나 모두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이순신·나대용·이설이 부상 당한 것은 이순신의 지휘선이 거북선의 위용을 확인하기 위해 너무 가까이 접근하다가 그랬을 것이다.

5월 29일의 ‘난중일기’이다.

“군관 나대용이 총에 맞았으며 나도 왼쪽 어깨 위에 탄환을 맞았다. 탄환이 등을 뚫고 나갔으나 중상이 아니었다. 사부와 격군 가운데도 탄환 맞은 사람이 많았다. 적선 13척을 불태우고 물러 나왔다.”

날이 저물자 조선함대는 배를 돌려 사천만 입구 쪽에 있는 모자랑 포에 정박하였다.

사진 임진일기 (아산 현충사 전시)
사진 임진일기 (아산 현충사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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