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288) - 宿深村(숙심촌)
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288) - 宿深村(숙심촌)
  • 장희구 시조시인문학평론가
  • 승인 2022.08.29 08: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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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막걸리 잔에 술부어 주며 못 가게 말리네 : 宿深村 / 면암 최익현

깊은 산골 마을에 오랜만에 손님이 찾아들면 온 동네가 욱신거린다. 잔칫집 분위기를 방불케 한다. 복실이 엄마도 술 한 주전자를, 떡남이 누나는 전 안주를 붙여 들고 오며 손님을 반기기도 한다. 하룻저녁만 더 자고 가라고 아우성을 치는가 하면, 옷자락을 휘어잡는 늙은이들도 있다. 정감 넘치는 우리네 풍경이자 미담이다. 너무 고마워라 먼 길손 위로하는 고을 늙은이들, 큰 막걸리 잔에 술을 부어 주며 못 가게 말린다고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宿深村(숙심촌) / 면암 최익현

집 한 채 짓는데 깨끗한 곳 차지하고

고목거친 등덩굴은 몇 해나 되었을까

늙은이 길손 막으며 술 한 잔을 하자네.

結廬堪愛占淸幽 古木荒藤閱幾秋

결려감애점청유 고목황등열기추

多謝村翁勞遠客 引傾大白勸遲留

다사촌옹로원객 인경대백권지류

큰 막걸리 잔에 술부어 주며 못 가게 말리네(宿深村)로 제목을 붙여본 칠언절구다. 작가는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1833~1906)이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아끼는 집 한 채를 지었는데 깨끗한 곳 차지하고 / 고목을 거친 등덩굴은 몇 해나 되었을까 // 너무 고마워라 먼 길손 위로하는 고을 늙은이들 / 큰 막걸리 잔에 술부어 주며 못 가게 말리네]라는 시심이다.

위 시제는 [산 속 깊은 마을에서 묵다]로 번역된다. 인적이 드문 산촌에 손님이 찾아오면 반갑기 그지없다. 낯선 사람과 친숙한 사람을 가릴 것이 없다. 등이라도 칠 양으로 손을 부여잡고, 막걸리 잔에 권커니 받더니 몇 순배씩 돌아간다. 대화는 무르익어 세상 돌아가는 물정이며 야박한 인정까지 호롱불이 꺼질만큼 입에 게거품을 머금어 가며 정담을 나누기도 한다. 시인이 찾았던 깊은 마을에서도 대화의 차창車窓은 아마 그랬던 모양이다. 아끼는 집 한 채 새로 지은 깨끗한 곳을 차지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고목을 거친 등덩굴은 몇 해나 되었을까 하는 집안의 사정과 대화의 한 장면들을 가만히 떠올리고 있다. 현재의 상황과 지난날의 회고까지를 겸하고 있어 보인다. 화자의 시상은 후정의 답배答盃들이 물씬 녹아있음을 보인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사람에게 이렇게 고마운 대접을 해 주니 고맙고 감사하는 정성 담아냈겠다. 고맙고 너무 고마워라, 먼 길손 위로하는 고을 늙은이들, 큰 막걸리 잔에 술을 가득 부어 주며 못 가게 말린다는 시심을 담아냈다. 이런 정신이 우리 농촌의 후한 인심이었다.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아까 집은 깨끗하고 등덩굴은 몇 해던가, 늙은이들 길손 위로 막걸리잔 술 부으며’라는 시인의 상상력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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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구 시조시인/문학평론가
장희구 시조시인/문학평론가

작가는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1833~1906)으로 조선 말기의 애국지사이다. 1855년(철종 6) 승문원부정자를 거쳐, 순강원수봉관·사헌부지평·사간원정언·신창현감·성균관직강·사헌부장령·돈녕부도정 등의 관직을 두루 역임했던 순국지시다. 1870년(고종 7) 승정원동부승지를 지냈던 것으로 알려진다.

【한자와 어구】

結廬: 초가집을 짓다. 堪愛: 아끼다. 占淸幽: 깨끗한 곳을 차지하다. 古木: 고목. 荒藤: 등나무 넝쿨. 閱幾秋: 몇 겨울을 지내다. 몇 년이나 되다. // 多謝: 많이 고맙다. 村翁: 고을 늙은이. 勞遠客: 먼 길손을 위로하다. 引傾: 끌어당겨 기울다. 大白勸: 크게 말하며 권하다. 遲留: 못가게 말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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