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 - 3회 거북선 이야기
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 - 3회 거북선 이야기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 승인 2022.07.11 08: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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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거북선이다. 서울 광화문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에도 거북선이 앞에 있다. 우리는 거북선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는가. 우선 네 가지를 알아보자.

1. 거북선은 누가 만들었나?

2. 거북선이 건조된 때는?

3 거북선 첫 출전은 어느 해전이었나?

4. 한산대첩에 거북선은 몇 척 출전했나?

첫째, 누구나 거북선을 창제한 이는 이순신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이순신이 직접 거북선을 설계하고 건조한 것은 아니리라. 거북선을 만든 실무 책임자는 나주 출신 나대용이다. 그는 1591년에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감조전선 출납군병 군관(監造戰船出納軍兵軍官 전선 건조를 감독하고, 군병의 출납을 담당하는 군관)이 되었다. 1606년 12월 24일 자 ‘선조실록’에 나온다.

둘째, 거북선이 건조된 시기는 1592년 4월 초이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나온다. ‘난중일기’를 읽어보자.

1592년 2월 8일

거북선에 사용할 범포(帆布: 돛을 만드는데 쓰는 베) 29필을 받았다

3월 27일

거북선에서 대포 쏘는 것을 시험하였다

4월 11일

(전라도) 순찰사(이광)의 편지와 별도의 기록을 순찰사의 군관 남한이 가져왔다. 비로소 포범(布帆: 돛)을 만들었다.

4월 12일 맑음

아침밥을 먹은 후 배를 타고 거북선에서 지자포(地字砲)와 현자포(玄字砲)를 쏘아보았다. 순찰사의 군관 남한이 살펴보고 갔다. 정오에 동헌으로 옮겨 앉아 활 열 순을 쏘았다. 관아에 올라갈 때 노대석을 보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하루 전에 거북선에서 함포 사격을 마친 것은 정말 드라마틱하다.

셋째, 거북선은 1592년 5월 29일 사천해전에서 첫 출전했다. 사천해전은 사천 앞바다에 정박 중이던 일본 함선 12척을 격멸한 전투이다. 이 해전에서 귀선 돌격장 이기남이 지휘하는 거북선이 사천 선창으로 돌진하며 함포사격을 했다.

이순신은 6월 14일에 조정에 올린 ‘당포 등에서 왜적을 무찌른 장계(唐浦破倭兵狀)’에서 아래와 같이 적었다.

“신이 일찌기 왜적들의 침임을 염려하여 특별히 거북선(귀선 龜船)을 만들었는데, 앞에는 용머리(龍頭)를 붙여 그 입으로 대포를 쏘게 하고(口放大砲), 등에는 쇠못을 꽂았으며(背植鐵添), 안에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으나 밖에서는 안을 엿볼 수 없게 하여, 비록 적선 수백 척 속에라도 돌입하여 포를 쏘게 되어 있으므로 이번 싸움에 돌격장이 이 귀선을 타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먼저 거북선으로 하여금 적선 속으로 돌진케 하여 먼저 천자포(天字砲)·지자포(地字砲)·현자포(玄字砲)·황자포(黃字砲) 등의 각종 총통을 쏘게 하자, 산 위와 언덕 밑과 배를 지키는 세 곳의 왜적들도 비오듯 철환을 난발하는데, 간혹 우리나라 사람도 섞여서 쏘고 있었습니다. 신은 더욱 더 분하여 노를 빨리 저어 앞으로 나아가 바로 그 배를 두들겼습니다. (...) 접전할 때 적의 총알이 신의 왼편 어깨에 맞아서 등을 꿰뚫었으나 중상에 이르지는 않았고, 신의 군관인 봉사 나대용도 총알을 맞았으며, 전 봉사 이설은 화살을 맞았는데 모두 죽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거북선이 첫 출전한 사천해전에서 거북선을 만든 이순신과 나대용이 동시에 부상 당한 일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한편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지하에 있는 ‘충무공 이야기’ 전시관에는 “거북선은 백병전에 능한 일본의 강점을 분석해 판옥선 위에 덮개를 덮고 창칼을 꽂아 적이 뛰어오르지 못하도록 만든 돌격용 전투함”이라고 적혀있다.

사진 1 조선의 전투함 - 판옥선과 거북선 (세종문화회관 ‘충무공 이야기’ 전시관)
사진 1 조선의 전투함 - 판옥선과 거북선 (세종문화회관 ‘충무공 이야기’ 전시관)

넷째, 7월 8일에 학익진 전법으로 대승을 거둔 한산대첩에서 거북선은 몇 척 출전하였는가? 한산대첩에는 본영(本營)과 방답(防踏) 거북선 두 척이 출전했다. 좌돌격 귀선장은 급제 이기남이고 우돌격 귀선장은 급제박이량이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와 ‘임진장초’등에 의하면 1592년 임진년에 거북선은 본영(여수시 중앙동 전라좌수영 선소 船所)과 방답(여수시 돌산읍 군내리 방답진 선조) 귀선 두 척이고, 1593년에 순천(順天 여수시 시전동 순천도호부 선소) 귀선이 합류하여 3척이 되었다. 참고로 1595년에 명나라에 보낸 외교문서에는 ‘한산도에 거북선이 5척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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