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수 그늘
가로수 그늘
  • 문틈 시인
  • 승인 2022.05.25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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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수는 마치 줄지어 전선으로 행군하는 군대 같다. 길 양 옆으로 먼지 풀풀 날리는 신작로가에 서있던 내 어린 날의 가로수 대열은 세상이 변하면서 문명의 포장도로가에 서 있게 되었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대도시나 작은 도시의 큰길가에 서 있는 가로수들은 거기에 있음으로서 한 몫을 한다.

가로수는 사람들의 반려목이다. 가로수는 사람들이 사는 도시의 풍경을 완성하고 아름답게 하는 구성원인 것이다. 가로수가 없는 도로를 상상해보라. 얼마나 삭막하고 쓸쓸할 것인가.

내가 가는 개인병원 내과의원 앞에도 플라타너스가 서 있다. 항상 그 자리에 서서 계절마다 다른 표정으로 나를 맞이한다. 볼 때마다 반가움이 인다. 사람들이 무심코 지나쳐서 그렇지 가로수는 늘 우리에게 아는 체를 한다.

나는 때때로 가로수에 다가가 두 팔로 안아 주기도 한다. 다정함을 전해주고 싶어서다. 가로수는 사람들과 여러 방식으로 소통한다. 연인을 만나는 장소의 표지가 되기도 하고, 여름날엔 그늘을 드리워 주는 서늘한 쉼터가 되기도 한다. 햇볕이 쨍쨍한 여름날 길가에 띄엄띄엄 서 있는 가로수 그늘을 징검다리삼아 걷던 기억을 다들 가지고 있을 것이다.

가로수 중에서 나는 플라타너스를 좋아한다. 은행나무의 찬란함, 벚나무의 화려함, 메타세콰이어의 간결함이 다 마음에 쏙 들지만 플라타너스는 유독 친근감이 든다. 우람하고 든든한 모습이 나를 지켜 줄 듯 품이 넉넉한 나무다. 나무는 굵고 잎새는 넓적하고 푸르름이 한창일 때는 울창한 숲을 이룬다.

해마다 봄이 오면 가로수 가지치기를 한다. 어디서 가로수를 요절을 낼 생각으로 전기톱을 들고 나타난 무서운 사람들이 나무를 도륙한다. 가지치기를 마친 플라타너스를 보면 마치 모든 팔을 잘라낸 것처럼 안쓰럽게 보인다. 저렇게 무지하게 쳐낸 가지치기를 당하고도 살아날 수 있을까.

거의 몸통만 남겨진 플라타너스는 5월에 다시 가치를 뻗고 속잎을 피운다. 흡사 죽은 나무가 기적처럼 다시 살아나는 것 같다. 나는 무지막지한 가지치기를 반대한다. 싹둑 가지들을 다 잘라버린 플라타너스를 보는 것은 끔찍하고 고통스럽다.

나무 가지 치기에 대해 미국의 알렉스 샤이고(Alex Shigo, 1930-2006) 박사는 자신이 쓴 책에서 “올바른 가지치기는 나무의 아름다움을 존중하고, 나무의 방어 체계를 존중하며, 나무의 품위를 존중한다”라고 했다.

그런데 어떤가. 이 나라의 가로수 가지치기는 ‘그릇된 가지치기는 나무의 아름다움을 훼손하고, 나무의 방어 체계를 파괴하며, 나무의 품위를 떨어뜨린다’고 쓴 그 모양 그 대로다. 마구 잘라버린 가로수, 몸통만 놔두고 가지를 다 쳐낸 플라타너스는 무지막지한 인간의 소행을 보여주는 것 같다.

가로수는 처음 조선 초기 세종 23년(1441)에 국가의 역로(驛路)에 표목(標木)으로 가로수를 심었다고 한다. 즉 거리를 알기 위해 길가에 나무를 심었다. 오리나무는 5리마다, 시무나무는 10리마다 심었다. 이는 길가에 나무를 심는 주나라의 제도를 따른 것으로, 나라에서 가로수를 심고 관리하였다.

조선 초 가로수는 큰길 좌우로 소나무, 잣나무, 배나무, 밤나무, 회화나무, 버드나무 등을 심었다. 정조 때에는 왕의 능 행차에 연관되어 소나무, 전나무, 버드나무 등을 가로수를 심어 성역화했다. 가로수가 왕의 근위병처럼 늘어서 있고 그 사이로 행차하는 왕의 위엄을 차린 모습이 멋지게 그려진다.

개항 이후 고종 32년(1895)에는 국가에서 도로 좌우에 가로수를 심을 것을 장려하였고, 당시 한양의 가로수는 사시나무가 속성수로서 주 품종으로 식재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태리포플러, 사시나무, 은백양 등의 포플러류가 가장 많이 식재되었으며 수양버들, 아까시나무, 플라타너스, 은행나무 등도 심었다.

해방 이후 가로수는 플라타너스, 은행나무, 이태리포플러, 가죽나무, 미루나무, 수양버들 순으로 많이 심었는데 그 가운데서 플라타너스, 은행나무를 가장 많이 심었고 그것이 오늘에 이르렀다(송석호 교수 논문). 이 땅의 가로수의 내력도 알고 보면 참 굴곡진 역사를 보여 준다.

광주의 위대한 시인 김현승은 가로수를 두고 ‘너는 사모할 줄 모르나/ 플라타너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먼 길에 올 제/ 호올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너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플라타너스’ 일부)고 노래한다.

호올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너스는 기꺼이 언제나 나의 동반자가 되어 주었다. 이제 여름이 오면 길 가의 플라타너스는 다시 생의 기운을 차리고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내가 호올로 되어 외로울 제 나를 달래줄 것이다. 길을 걸을 때 가로수는 늘 나와 힘든 여정을 함께 한다. 여름, 가로수 그늘에서 땀을 들이는 나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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