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부패로 망하다 (51) - 일본, 청나라를 이기다
조선, 부패로 망하다 (51) - 일본, 청나라를 이기다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21.11.15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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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6월 8일(음력 5월 5일), 고종의 요청에 의해 청군 3천 명이 아산에 도착했다. 일본군 8천 명도 6월 9일에 1885년에 청·일간에 맺은 천진조약에 따라 인천에 들어왔다.

경복궁 신무문
경복궁 신무문

이러자 6월 11일(음력 5월 8일)에 외세 개입을 우려한 전봉준은 전주성에서 전라감사 김학진과 화약(和約)후 자진 해산했다. 사태가 진정되자 고종은 청·일 양군의 동시 철병을 요구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물러나지 않고 7월 23일(음력 6월 21일)에 경복궁을 점령했다.

7월 25일에 일본 해군은 선전포고도 없이 아산만 앞바다 풍도에서 청나라의 함정을 기습 공격하여 청군 1,100여명을 익사시켰다.

일본군은 7월 30일에 아산·공주·성환 등지에 포진하고 있던 청군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그동안 일본은 1882년 임오군란과 1884년 갑신정변에서 청나라에 패배한 이후 군비 확충을 위해 전력을 다했다. 1883년부터 1893년까지 10년간 군함 55척을 보유하여 청나라 해군력과 필적하였고, 육군은 병력증강과 신무기로 무장하였다.

8월 1일에 일본 메이지 천황은 청나라에 정식으로 선전포고하였다.

전쟁의 명분은 조선을 속국으로 여기며 내정에 간섭하고 있는 청과 싸워 조선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저의(底意)는 청나라를 몰아내고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고자 함이었다.

한편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과 청의 전쟁은 문명과 야만의 싸움”이라고 주장했다.

7월 말에 경기도 성환에서 승리한 일본 육군은 북상하여 평양으로 향했다. 평양에서의 전투는 9월 5일부터 9월16일까지 벌어졌다. 청군의 병력은 1만 2천 명, 일본군은 1만 7천 명이었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평양전투를 기록하고 있다.

“청군은 통솔하는 원수가 없고 장수들의 직위가 서로 같아 호령도 한결같지 않았고, 군대는 기강이 문란했다. 청군은 간음과 약탈을 자행하여 평안도민들의 원망이 컸다. 반면에 일본군들의 명령은 매우 엄하였다. 사람을 살해하거나 촌락을 약탈하는 일이 없어 청군과는 크게 달랐다.”

이때 평양감사 민병석은 시국이 바뀌어 모든 민씨 척족들이 쫒겨나자 무슨 죄명이 내려질까 전전긍긍하고 있었는데, 김만식이 평양감사로 부임해 온다는 말을 듣고 당황하며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북양대신 이홍장의 전문을 받고 그는 김만식에게 감사 자리를 넘겨주지 않았다.

이러자 김만식은 평양 서윤 서병수와 함께 정방산성(正方山城)으로 들어가 40일 동안 나오지 못했다. 평안도 사람들은 「민병석은 청나라 감사이며, 김만식은 일본의 감사」라고 불렀다.

(황현 지음 · 허경진 옮김, 매천야록, 서해문집, 2006, p 210-211)

이게 고종의 나라였다. 청일전쟁통에 평안감사가 둘이라니.

한편 청군과 일본군은 대동강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그런데 일본군이 승기를 잡자 갑자기 섭지초가 지휘하는 청군이 백기를 내건 후 도주하였다. 이러자 일본군은 더욱 기세를 올려 청국 장수 조보귀를 포함하여 2천 명을 죽였다. 일본군의 압승이었다. 일본군 전사자는 162명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더 많이 처참히 죽은 사람들은 평양의 조선 백성들이었다. 그들은 주둔하고 있던 청군의 갖은 요구에 시달린 끝에, 지원부대로 강제 동원되었다가 청군이 쏜 유탄에 맞거나 일본군의 총알 세례를 받아 죽었다.

청군이 물러간 후 김만식은 평양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참혹한 전투를 을 치른 뒤여서 평양성 전체가 잿더미로 변하였고, 선화당 청판(廳板) 밑에는 시체가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 시체들은 성 밖으로 끌어내어 모두 불에 태웠으나 열흘 동안을 태워도 다 타지 않았다.

이윽고 9월 17일에 청국의 북양함대는 압록강 하구의 대동구(大東溝)에서 일본함대와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하고 말았다. 일본 군함 11척이 순식간에 청국 군함을 포위하고 맹렬히 공격을 가하여 청국 군함 4척을 침몰시켰다. 해군 제독 정여창은 가까스로 여순항으로 도주하였다.

이렇게 평양과 압록강 하구의 황해에서 대승을 거둔 일본군은 중국 본토에 대한 공략을 서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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