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의 북한 방문은 이루어질까?
교황의 북한 방문은 이루어질까?
  • 문틈 시인
  • 승인 2021.11.11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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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황이 북한을 방문하는 장면을 볼 수 있을까? 얼마 전 로마를 방문했던 문재인 대통령이 프란치스코 교황을 만난 자리에서 교황은 ‘공식 초청장이 오면 평양을 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교황의 북한 방문 이슈는 2000년 6.15남북정상회담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교황(요한 바오로2세)의 방북 의사를 전달했다. 이후 바티칸, 남한, 북한 간의 직간접적인 교감이 오갔고 가시적인 움직임도 있었다.

북한 정권은 수립 후 최초로 북한의 가톨릭 신자 3명(노인)을 로마에 보내 당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알현토록 했다. 그 때 교황이 평양에서 온 신자들에게 묵주와 십자가를 선물로 주었다. 그 선물들은 평양 장충동 성당에 전시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청년 2명을 로마 신학교로 유학을 보내 사제 수업을 받게끔 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2년 후 학업을 중단하고 평양으로 소환했다. 1988년엔 최초로 교황 특사단이 평양을 방문, 장충동 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했는데 이때 장익 신부가 특사단의 일원으로 북한 신자들과 면담을 한 적도 있다.

그러나 교황의 북한 방문은 성사되지 못하고 말았다. 아마도 생각컨대 북한 측에서 교황의 북한 방문으로 지하에 있는 기독교 신자들을 고무시켜 체제에 위협이 될 것을 걱정했던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해방 직후 북한엔 종교인이 전체 인구의 27%를 차지했다. 불교(40%), 천도교, 개신교에 이어 가톨릭 신자는 약 5만5,000명이었다. 북한 당국은 이들 종교인을 대상으로 공산주의 사회건설을 위한 탄압과 회유라는 양면 정책을 펼쳤다. 1968년을 기점으로 북한당국은 인민의 종교생활에 대한 감시를 풀고 한때나마 ‘가정예배’를 허용했다. 1988년 9월에는 평양에 장충성당과 개신교의 봉수교회도 세웠다.

현재 북한의 가톨릭에 대한 이미지는 1950년대와는 다르다. 과거에는 미제의 앞잡이로 봤는데 1988년 평양 세계청년학생 축전 때 문규현 신부, 임수경 학생의 방북을 계기로 달라졌다고 한다.

북한의 종교에 대한 정의도 바뀌었다. 1981년판 <현대 조선말 사전>은 “기독교는 낡은 사회의 사회적 불평등과 착취를 가리우고 합리화하여 허황한 천당을 미끼로 하여 지배계급에 순종할 것을 선교”한다고 했는데 2000년판 <조선대백과 사전>에선 “신의 아들이라는 예수를 크리스토로 내세우고 그에 의한 인류의 구제를 설교하는 종교”라고 풀이해 놓았다.

이 같은 북한의 종교정책 변화를 감안할 때 교황의 북한 방문은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본다. 게다가 김정은, 김여정은 스위스 유학시절에 이미 간접적으로 그리스도교 문화를 접해 낯설지가 않다.

교황의 해외순방은 의전상으로 국가 수반의 방문형식이지만 교황의 1차적 방문 목적은 사목방문이다. 그 땅에 단 한 명의 신자라도 있다면 그 사람을 만나 영적관계를 논하고 진전시키는 데 의의를 둔다.

교황은 공산국가 쿠바를 방문한 적이 있다. 문제는 북한 당국의 셈법에 달려 있다. 북한은 교황의 방문이 어떤 효과를 가져 올 것인가를 따져볼 것이다. 당시 김정일은 가톨릭 신자 3명을 찾아 로마에 보내놓고도 아직도 숨어 있는 신자들이 있다는 것에 내심 크게 놀랐다는 후문이다.

북한은 현재 교황의 북한 방문 의향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는 상태다. 방문을 한다 해도 현재 국면에선 코로나 때문에 문을 닫아걸고 있는 북한으로선 선뜻 응하기도 어렵지 않나 싶기도 하다.

한때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불리던 평양에서 교황이 미사를 집전한다면…, 상상만 해도 아름다운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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