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부패로 망하다 (48) - 민씨 정권의 세 도둑
조선, 부패로 망하다 (48) - 민씨 정권의 세 도둑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21.10.25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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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년 가을과 겨울 사이에 서울에 화적떼가 크게 일어나, 대궐로 진상되는 임금의 물건까지 도난당하는 일까지 생겼다.

경복궁 집옥재
경복궁 집옥재

이러자 고종은 좌우 포도대장 한규설과 이종건을 파직시키고, 신정희를 좌포도대장에 임명했다. 이러자 한 달 사이에 도둑들이 겁을 먹고 조용해졌다.

이 무렵에 백성들은 여흥민씨(驪興閔氏)들 가운데 ‘세 도둑’을 입에 오르내렸다. 즉 서울의 민영주, 강원도 민두호, 그리고 경상도 민형식(閔炯植)이었다. 민두호는 정권 실세 민영준의 부친이고, 민영주는 민영준과 종형지간이며, 민형식은 민영위의 서자였다.

민영주(1846∽미상)는 유생 시절부터 서울의 부자들과 서울 근교의 주요 나루인 한강 · 서강 · 마포나루등의 거상(巨商)의 재물을 약탈하였다. 그는 법을 무시하면서 사람들의 주리를 틀고 거꾸로 매다는 등 온갖 악형을 가해 날마다 돈을 긁어모았으며, 일상생활은 거의 임금수준의 호사생활이었다. 민영주는 1892년 12월에 이조참의를 지냈고 1893년 5월에는 성균관 대사성을 했는데, 너무나 흉악하여 사람들은 그를 ‘민 망나니’라고 불렀다. 망나니는 칼춤을 추는 사형 집행수의 속된 말로 이루 말할 수 없이 악하고 천한 이를 표현하는 말이다.

민두호는 1887년부터 춘천부사를 했는데, 춘천을 유수(留守)로 승격하여 임금이 머물 숙소인 행궁을 짓자, 실세 민영준이 아버지 민두호를 그대로 유수 자리에 앉혔다. 그리하여 민두호는 1892년부터 1893년 5월까지 춘천부 유수로 근무하다가 잠시 독판내무부사(督辦內務府事)를 하였고, 다시 1893년 12월부터 춘천부 유수를 하였다.

그런데 민두호는 어리석고 천박할 뿐만 아니라 흉악하고 욕심이 끝이 없었다. 민두호가 유수로 부임한 지 몇 년이 지나지 않아 강원도 백성들은 먹고 살기 힘들어 뿔뿔이 흩어지는 사태까지 이르렀다. 백성들은 민두호를 ‘민 쇠갈고리’라 불렀다.

민형식은 1891년 12월에 삼도 수군통제사가 되었는데 나이 33세였다. 그는 통제사로 부임한 1년 사이에 삼도의 부자들을 무조건 잡아 가두고 재산을 갈취했다. 오죽했으면 백성들이 그를 ‘악귀(惡鬼) 또는 미친 호랑이(狂虎)’라고 불렀을까? 이런 말들은 그가 사람을 산 채로 씹어 먹을 정도로 포악하다는 뜻이었다. 특히 민형식은 당시 국가 세입 480만 냥의 15%에 해당하는 70만 냥을 치부했으니 세 도둑 중에 가장 큰 도둑이었다.

이 당시에 중전 민씨의 비호를 받은 민씨 척족들은 하나같이 탐학하였다. 팔도의 큰 고을은 대체로 민씨척족들이 수령을 차지하였으며, 평안 감사나 통제사는 10년 넘게 민씨가 아니면 차지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조선 팔도에는 민씨척족을 원망하는 소리로 뒤덮였고 아이들 노래나 많은 사람들의 소리가 온통 ‘난리가 왜 일어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한편 독립운동가 박은식은 『한국통사(韓國痛史)』에서 1884년 갑신정변 후 10년 동안 부패가 극도에 치달았다고 통렬히 비판했다.

“갑신정변 이후 10년간 내정의 부패가 극에 달해갔다. 외척들은 세력을 믿고 다투어 방자한 짓을 하고 탐욕과 사치를 일삼았다. 환관들은 왕의 은총을 도적질하여 마음대로 권력을 휘둘렀고, 시정 무뢰배가 정,관계 일에 간섭하고 다투어 거간꾼 행세를 하였다. 무당과 점쟁이 같은 요괴한 천류들이 은택(恩澤)을 더럽히고 음사(淫祀 부정한 귀신에게 제사지냄)를 널리 확장하였다. (대표적 무당이 1882년 임오군란 때 민왕후가 장호원에 피신할 때 만난 진령군이었다. - 필자 주)

또한 큰 잔치를 거행하지 않은 해가 없었고 밤새도록 행한 연회가 낮이 되어도 그치지 않았으며, 광대와 기녀들이 백 가지 유희를 연출하였다. 주지육림(酒池肉林)에 허비된 비용이 수만금이나 되었으니, 그것은 모두가 백성의 피를 빨아 긁어모은 것이었다.

지방관리들은 모두 돈을 바치고 관리 노릇을 했다. 그래서 그물로 고기를 잡듯이 이득을 다 차지하는 것을 직으로 삼고, 게다가 연못까지 말려 고기를 잡아가듯이 남김없이 빼앗아 갔다.

백성들은 모두 생업을 잃고 원망이 하늘까지 치솟았는데 산간으로 도망하여 무리를 모아 관리를 축출하고 곳곳에서 봉기하였다. 이에 동학무리들이 시세에 편승하니 혁명 풍조가 무르익었다.” (박은식 지음 · 김승일 옮김, 한국통사, 범우사, 1999, p 13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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