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부패로 망하다 (47) - 고종과 민왕후의 부패
조선, 부패로 망하다 (47) - 고종과 민왕후의 부패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21.10.18 09: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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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수절 선물

1887년 7월, 고종의 만수절(萬壽節 생일)에 민영환과 민영소가 함께 들어가 축하를 하였다.

신무문 (경복궁의 북문)
신무문 (경복궁의 북문)

만수절이면 감사나 수령들이 으레 진상품을 올리는데 항상 척신을 통해 바쳤다. 먼저 민영환이 경상감사 김명진의 진상품 목록을 바쳤는데 왜국 비단 50필과 황저포 50필이었다. 고종이 얼굴빛이 변하더니 진상품 목록을 상 아래로 던져버렸다. 이러자 민영환이 황공해하며 목록을 주워 소매 속에 넣었다.

이어서 민영소가 전라감사 김규홍의 진상품 목록을 바쳤는데, 춘주 오백필과 갑초 5백필, 백동 5합, 바리 50개에 다른 물목들도 많았다.

고종은 얼굴에 기쁜 빛이 돌면서 말했다.

“감사가 이 정도의 예를 차려야 마땅하지 않은가? 김규홍은 나를 사랑하는구나.”

김명진의 사위인 민영환이 물러나 자기 돈 2만 냥을 더해서 바쳤다.

# 좌의정 김병시의 사직

1886년(고종 23년) 8월 16일에 사직서를 제출한 좌의정 김병시가 고종을 면담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긴급 사항에 대해 아뢰었다. 법령 시행, 재용(財用), 수령 교체, 화폐, 국방, 외교 등이었다.

여기에서 수령 교체와 관련하여 살펴보자.

“수령이란 백성들을 가까이하는 사람으로서 백성들이 잘되고 못 되는 것이 그에게 달려 있습니다. 책임이 가볍지 않은 만큼 선발을 신중히 해야 하는데, 주의(注擬)하는 것이 조잡하여 많은 경우 적임자가 선발되지 못합니다. 또한 교체가 빈번하여 간혹 부임하러 가는 도중에 돌아서는 때도 있어서 영락된 고을이 영접하고 전송하느라고 곤경을 치르고, 가난한 백성들은 가렴주구(苛斂誅求)에 시달림을 받으며 아전들은 이 틈을 타서 농간을 부리고 백성들은 목숨을 부지할 수가 없습니다.”

(고종실록 1886년 8월 16일)

그랬다. 당시는 감사·병사에서 수령과 진장(鎭將)에 이르기까지 매관매직으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5만 냥을 바치고 수령에 임명되었더라고 그 뒤에 5천 냥을 더 내놓은 자가 있으면 먼저 임명된 자는 도태되었다. 그래서 부임하던 자가 중도에 수레를 돌려야 했고, 시골 사람으로 벼슬을 사려던 자가 간혹 패가망신하기도 했다.

영남지방의 어느 고을에서는 1년 사이에 4번이나 신임 사또를 맞이해야 했다. 따라서 수령들은 교체되지 않은 몇 달 사이에 바삐바삐 돈을 긁어 모았는데 이러다 보니 부자나 가난한 자나 약탈을 당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이렇다 보니 백성들은 더욱 곤궁해져 살 의욕을 잃고 말았다.

2년 뒤인 1888년 8월 26일에 좌의정 김병시는 고종을 면담하고 또 다시 아뢰었다.

"현재 가장 급하고 절실한 문제는 민생입니다. 백성들이 없으면 어떻게 나라가 되겠습니까? 백성들은 지금 곤경에 처하여 있습니다. 근거 없는 말이 한번 나돌면 민심이 쉽게 소란해집니다. 게다가 탐욕스러운 관리들까지 침해하는 데다가 핍박하고 재물을 긁어 들여, 이 불쌍하고 곤궁에 처한 백성들이 살아갈 수 없으니, 백성의 위태로움이 참으로 두려울 지경입니다.“

이러자 고종은 각별히 유념하겠다고 답했다.

(고종실록 1888년 8월 26일)

하지만 고종은 겉과 속이 달랐다. 말뿐이었고 행동은 딴 판이었다. 이후 김병시는 좌의정을 사직하였다.

# 민왕후의 관직 남발

민왕후는 관직을 지나치게 남발했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나온다.

(황현 지음 · 임형택 외 옮김, 역주 매천야록 상, p 254–255)

성택과 억길은 가마 매는 일로 업을 삼고 있었는데, 1882년 임오군란으로 중전이 충주 장호원 민응식의 집으로 피신할 때, 이 두 사람이 가마꾼으로 공로가 있었다. 1882년 8월 1일에 환궁한 중전은 두 사람에게 벼슬자리를 주어 성택은 여러 번 자리를 옮겨 전라병사에까지 이르렀고, 억길은 낙안군수에까지 이르렀다.

또한 민응식은 1882년 임오군란 때 중전을 장호원 자기 집에 모신 공로로 1년도 안 되어 벼슬이 평안감사에 이르렀다. 궁중에서 중전을 업고 탈출한 무예별감 홍재희(홍계훈으로 개명)도 승승장구하여 1894년 동학농민 전쟁 때 양호 초토사였다.

한편 자칭 의원(醫員)인 남원의 최석두는 떠돌다가 서울에 머물렀다. 이때 중전이 대하증에 걸려 고생을 하고 있었는데, 최석두가 처방을 한 약을 올렸더니 약간 효험이 있었다, 중전을 크게 기뻐하며 그를 전라도 고산 현감에 제수했다.

보성 사람 정순묵은 하급관리로서 횡령을 하다가 적발되어 서울로 달아났다. 때 마침 중궁이 감기에 걸렸는데 시렁탕 두 첩을 올려 감기를 낫게 하여 즉시 영평군수에 임명되었다.

이렇게 민왕후는 무소불위(無所不爲)로 관직을 남발했다. 그녀는 조선의 왕비 중에 최고의 권력을 휘두른 왕비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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