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부패로 망하다 (44) - 나라를 망친 무당 진령군
조선, 부패로 망하다 (44) - 나라를 망친 무당 진령군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21.09.28 10: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매천 황현의 『매천야록』과 『오하기문(梧下記聞)』에는 무당 진령군 이야기가 적혀있다.

경복궁 건천궁 옥호루 (명성황후가 시해된 곳)
경복궁 건천궁 옥호루 (명성황후가 시해된 곳)

1882년 6월 임오군란 때 민왕후가 충주 장호원 민응식의 집에 피난 가 있을 때 요사스러운 무당이 찾아와 뵙고 환궁할 날짜를 점쳐주었다. 그 날짜가 들어맞자 중전이 신기하게 여겨 무당을 데리고 8월 1일에 환궁했다.

무당은 매양 중전이 머리가 아프다고 하면 머리를 만지고, 배가 아프다면 배를 쓰다듬었는데 그럴 때마다 중전의 병세가 호전되었다. 이러자 중전은 잠시도 그녀와 떨어져 있지 않았고 그녀를 ‘언니’라고 불렀다.

그런데 무당이 궁중에 상주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무당은 중전에게 ‘자기는 본래 본디 관운장의 딸이니 신당을 지어주라.’고 요청했다.

고종과 중전은 1883년 10월 21일에 창덕궁에서 가까운 산기슭 조용한 곳에 북묘(北廟)를 지어 주었는데, 송시열이 살았던 송동(宋洞 지금의 혜화동)이었다. 임진왜란 이후에 명(明)나라 장수가 관왕(關王 관우)의 신령이 나타나서 몰래 도와준 일이 있다고 하여 조정은 동쪽과 남쪽에 두 개의 관왕묘(關王廟)를 지었다. 동묘(東廟)와 남묘(南廟)이다. 이는 숭상하고 찬양하는 뜻을 표시한 것이지, 오로지 복을 빌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종과 중전은 왕세자와 함께 북묘에 가서 제사를 올렸고, 창덕궁에서 산 너머 북묘까지 길도 새로 닦았다.

이후 무당은 아무 때나 대궐에 나아가 고종과 중전을 뵈었으며 때로는 남자 옷으로 단장하기도 하였다.

고종과 중전은 그를 가리키며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군(君)이 되니 믿음직하도다.”

조선에서 천민 중 천민인 무당에게 왕족에게나 붙는 군(君)의 칭호를 붙여, 진령군(眞靈君)으로 봉했으니 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가?

임오군란 2년 뒤인 1884년 10월에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 서재필 등 20~30대 젊은 급진 개화파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갑신정변이다. 청국과 결탁한 민씨 수구파를 척살하고 근대적 자주 국가를 만들고자 함이었다.

급진 개화파는 일본의 지원을 받아 정변에는 성공했지만, 청나라의 신속한 개입과 일본군의 철수로 ‘3일천하, 정확히 말하면 46시간 천하’로 끝났다. 1884년 10월 17일 밤 10시에 우정총국 낙성식(落成式) 연회에서 시작한 정변은 10월 19일에 청나라가 창덕궁을 공격하자 중전은 진령군이 있는 북묘로 피신했다. 이 날 밤에 고종도 중전을 뒤따라 북묘로 거처를 옮겼다가 그 길로 선인문(宣仁門) 밖에 있는 청나라 오조유의 처소로 옮겼다. (고종실록 1884년 10월 19일)

고종과 중전은 관운장이 자기들을 두 번이나 살렸다고 생각하여 진령군에 더욱 의지하였고 그녀에게 금은보화를 수시로 하사했다.

한편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동쪽 마당에는 '북묘묘정비(北廟廟庭碑)'가 있다. 비는 1887년에 세웠는데 글은 고종이 지었고 글씨는 민영환이 썼다. 비문엔 “나와 중전의 꿈에 관운장이 나타났다. 임오년 병란(1882년)에 관운장이 목숨을 구해주었다. 관운장을 위해 사당을 짓고 북묘라 이름했다. 갑신년(1884년)에 역적들이 난을 일으켰다. 북묘로 가서 적을 피하니 흉도들 목을 베고 적을 물리쳤다.”고 적혀있다.

진령군은 궁중에 출입한 지 1년도 안 되어 국정을 농단했다. 그녀의 말 한마디에 수령과 변장(邊將, 지방의 군사 지휘관)들이 나왔다. 이에 부끄러운 줄 모르는 대신들이 앞다투어 그녀에게 아부하니, 혹은 자매라 부르기도 하고 혹은 수양아들이 되기를 원하기도 하였다. 조병식, 윤영신, 정태호, 이용직이 특히 심했다. 이들은 무당의 도움으로 출세했다.

이유인은 진령군과 모자의 연을 맺었는데 추잡한 소문이 들렸다. (황현 지음·허경진 옮김, 매천야록, p 94-96)

조병식은 1876년 충청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1878년에 탐학하다는 이유로 전라도 지도(智島)에 유배되었는데 1886년에 예조판서에 올랐다.

윤영신은 1869년 3월에 일어난 광양민란 때 광양 현감이었는데, 승승장구하여 1884년 12월에는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다.

정태호는 1876년 황해도 관찰사로 재직 중 수뢰와 축재로 제주도에 위리안치되었는데 1880년에 풀려나, 1882년 예방승지가 되었고 1884년 이조참판 1886년 강원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이용직(李容直)은 고종에게 돈을 주고 1893년에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수탈의 달인이었다. 1894년 12월에 총리대신이 그를 처벌하도록 아뢰었는데 수탈한 48만 냥이었다. (고종실록 1894년 12월 27일) 이는 당시 정부 세입 480만 냥의 10%에 해당하는 돈이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