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전주곡
가을 전주곡
  • 문틈 시인
  • 승인 2021.08.31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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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흘 비가 내린다. 가을을 재촉하는 비다. 여름의 모든 것들에게 안녕을 고하고 여름이 이룩한 성취들을 결실하는 가을이 오고 있다. 가을의 초입에 내리는 비는 아직도 여름 기운이 생생한 풀이며 나무, 꽃들을 적신다. 나는 따로 갈 곳이 없는데도 우산을 펼쳐들고 길을 나선다.
 늘 내가 걷던 산책길. 개울물 소리도 완연 가을을 속삭이는 소리다. 어딘가 야윈 듯한, 쓸쓸한 물소리가 귀를 적신다. 개울 옆으로 풀들은 키가 넘게 웃자라 있다. 그렇게 보아서인지 저 무성한 잡초들도 여름이 가는 것을 알고 있는 듯하다. 독기를 품은 듯 풀내음이 자욱하던 한여름과는 다르게 서늘한 바람에 흔들리며 여름에게 작별을 하는 모습들이다.
이제 가을이 오면 풀들은 푸른 빛이 옅어지고 가을에게 몸을 내맡길 것이다. 계절은 어김없이 이렇게 철따라 오고 간다. 천지를 운행하는 알지못할 자연의 대법칙이 무섭도록 신비스러울 따름이다.
내 마음이 가라앉으며 깊은 침묵을 그리워하는 것은 가을 빗소리에 나를 내주고 싶어서인지도 모른다. 분명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비 때문일 것이다. 얼굴을 스치는 바람결이 다르다. 서늘한 바람이다. 바람에 실려 빗방울들이 간간히 내 얼굴에도 차갑게 떨어진다.
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 하나하나를 모아 들으며 나는 어쩐지 서러운 마음이 든다. 우산에 비껴 듣는 빗소리들은 마치도 오선지에 음표들이 제각각의 높낮이를 자리하듯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가을의 전주곡이랄까, 여름이 가을에게 길을 내주고 가는 뒷모습을 어디서나 볼 수 있다.
여름내 태양은 열매들을 익히려고 한껏 뜨거운 입김을 불어넣었다. 실과들은 더 크게 부풀어올랐다. 태양의 열렬한 입맞춤 자국이 산과일들, 실과들의 모든 성취에 스며 있다. 절기로는 8월 23일이 이슬이 내리기 시작한다는 백로. 백로가 지나자 금방 아침 저녁으로 찬 기운이 옷깃을 파고 든다.
여름의 옷을 벗어 던지고 소매가 긴 옷으로 갈아입는다. 일기예보를 하는 유튜버는 기상도를 보여주며 가을장마 전선이 남부지방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계속될 것이라 한다. 가을 태풍도 몇 번 찾아올 것이라 한다.
이제 막 가을이 오고 있는데 어찌하여 나는 벌써부터 방랑자처럼 멀리 떠나고 싶어지는 것인지 모르겠다. 숲 속으로 몸을 달리는 산짐승처럼 어딘가로 가서 산과일들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때 그때 나타나고 싶다. 여름이 와서 길쌈을 하고 간 것들을 찾아보며 내가 어디쯤에 와 있는지를 알아보고 싶다.
나는 굳게 믿는다. 이 천지간에 내가 어이하여 세상에 나와 있는지를 오직 자연만이 알고 있을 것이라고. 지금 나는 그런 생각으로 길을 걷는다. 시작도 나요, 끝도 나다. 나로 시작하여 나로 끝나는 세상의 이치를 알아보고 싶은 것이다.
가을은 이런 답도 없는 의문을 들고 일어나게 한다. 그래서 나는 가을을 응시하며 답을 얻어보려 길을 걷는다. 가을길에서 가녀린 코스모스가 길가에 줄지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 밭두렁에 애호박에 달린 호박꽃이 시들고 있는 정경은 이미 가을이 한 걸음 성큼 다가왔음을 보여준다.
여름내 푸른 나뭇잎새로 몸을 가리고 있던 감은 빨간색으로 치장을 하고 존재감을 드러낸다. 산과일들도 푸르름에 가려 있다가 가을에 몸을 나타낸다. 가을은 분명 무엇인가 답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는 가을과 문답을 할 수가 없다.
가을은 내게는 거대한 의문 같아서 그냥 바라보기만 할 따름이다. 시인은 가을을 노래하지만 진정 가을을 알아서가 아니라 알고싶어서다. 그렇잖은가. 사랑을 구한 자는 사랑노래를 하지 않는다. 단지 사랑을 구하려 할 때만 노래할 뿐이다.
나는 이 땅에 오는 가을의 기미를 감촉하면서 내가 가진 알량한 것들을 죄다 여름에 주어 떠나 보내고 싶다. 고백하건대 내가 일평생 알아 왔던 것이라곤 기실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것으로는 가을이 오는 길을 알아내지도 못한다. 나는 너무나 무지하다. 이대로 허허롭게 비어 있고 싶다.
부처가 말한 물아양망(物我兩忘), 자연과 나를 다 잊어버린 상태에 들어가고 싶다. 뜨거운 여름의 욕망에 시달려 헤매다가 이제야 정신을 차리고 만물을 수확하는 계절에 나는 손을 건넨다. 부디 내 야윈 손을 잡아 달라고. 가을과 만날 때 비로소 나는 내게 괜찮다, 괜찮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가을이 오면 날마다 걸어야겠다고 나는 다짐한다. 이 계절 때로 나를 잊고 가을에 몸을 맡기고 싶은 이 마음을 고이 간직한 채 나의 길은 끝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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