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부패로 망하다 (40) -임오군란은 부패에서 발단했다. (3)
조선, 부패로 망하다 (40) -임오군란은 부패에서 발단했다. (3)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21.08.23 09: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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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6월 10일에 성난 군졸과 하층민들이 창덕궁 돈화문으로 몰려가자 겁에 질린 수문장은 도망갔다.

장호원 민응식의 집 (지금은 감곡 매괴 성당이다.)
장호원 민응식의 집 (지금은 감곡 매괴 성당이다.)

난군(亂軍)들은 민생을 파탄 낸 민왕후부터 찾았다. 장막과 벽을 창으로 찌르면서 온통 궐 안을 샅샅이 수색했다.

이러자 변란에 놀란 고종은 급히 흥선대원군을 불렀다, 대원군은 부대부인 민씨와 함께 입궐했다. 부대부인 민씨는 민왕후를 사인교 안에 숨기고 휘장을 가리고 나왔다. 그런데 한 궁녀가 왕후가 저기 있다고 외쳤다. 난군들이 사인교의 휘장을 찢고 왕후의 머리채를 끌어내 땅바닥에 팽개쳤다. 이 때 무예별감 홍계희(나중에 홍계훈으로 개명)가 크게 외쳤다.

“이 여인은 상궁으로 있는 내 누이이니 오인하지 말라.”

홍계희는 민왕후를 업고 창덕궁을 간신히 빠져나와 화개동 윤태준의 집으로 모시고 갔다. 왕후는 그곳에 은신하다가 여주의 민영위 집에 며칠 머물다가 다시 충주 장호원 민응식의 집으로 피신했다. (고종실록 1882년 7월 25일)

민왕후가 피난하면서 한강을 건너려고 하자 뱃사공들이 난색을 표하면서 말했다.

“서울에서 뱃길을 끊으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도구나 행색이 의심스러우니 건네줄 수가 없습니다.”

민왕후가 금가락지를 빼어 가마 밖으로 던져주자 비로소 강을 건널 수 있었다.

이윽고 왕후가 경기도 광주를 지나다가 쉬는데, 어떤 할미가 다가와 피난 가는 아낙네로 생각하며 한마디 했다.

“중전이 음란하여 이런 난리가 일어나 낭자가 여기까지 피난 오게 되었구려”

왕후는 말없이 듣기만 했는데, 나중에 환궁한 뒤 이 마을을 모두 없애 버렸다. 따라간 자들이 뱃사공의 죄도 다스리자고 했지만 그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감곡매괴성당 전경
감곡매괴성당 전경

한편 고종은 군사들의 변란에 놀라 스스로 자책하는 전교를 내렸다.

"오늘의 일에 대해 어떻게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다만 부덕한 내가 외람되이 크나큰 왕업(王業)을 이어 백성들을 제대로 돌보아주지 못한 결과 전에 없던 이런 변고를 초래하였다. 이것이 어찌 그들이 일부러 범하고 화(禍)를 즐겨 그런 것이겠는가? 첫째도 나의 잘못이고 둘째도 나의 잘못이다. 말이 이에 미치니 절로 한심해진다. 승정원에 있는 승지들은 일일이 효유(曉諭)하여 그들로 하여금 물러가게 하라."

(고종실록 1882년 6월 10일)

하지만 성난 군졸들에겐 고종의 전교가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군졸들은 중전 민씨를 찾아내기 위해 궁궐을 계속 뒤졌다.

이러자 대원군은 ‘중전이 죽었다.’고 꾸몄고, 고종은 “중궁전(中宮殿)이 오늘 오시(午時)에 승하하였다. 거애(擧哀)하는 절차는 규례대로 마련하고 망곡처(望哭處)는 명정전(明政殿) 뜰로 하라. 빈전(殯殿)은 환경전(歡慶殿)으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고종실록 1882년 6월 10일)

이윽고 국장도감이 설치되고 국상(國喪)은 18일로 정해졌다. (고종실록 1882년 6월 11일) 이러자 11일에는 시체도 없이 목욕과 염(殮)을 행했으며, 14일에는 시체 대신 옷을 관에 넣고 입관 의식을 치른 후 빈소까지 차렸다. 국상이 18일에 치러졌다. 장호원에 숨어있는 민왕후는 공식적으론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임오군란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자 고종은 흥선대원군에게 전권을 맡겼다. 8년 만에 정권을 장악한 대원군은 곧바로 군인들에게 녹봉미 지급을 약속하고, 별기군을 혁파해 5군영 체제로 군제를 되돌렸다. 이러자 군졸들은 궁중에서 물러나 질서가 회복될 수 있었다. 이어서 대원군은 통리기무아문을 폐지하고 삼군부를 부활시켰고, 위정척사운동으로 유배당한 유생들 900명을 석방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한편 민왕후는 은밀히 고종에게 살아있음을 알리고 민씨 척족을 통해 청나라에 있는 영선사 김윤식에게 통지하여 청나라에 변란을 알렸다. 김윤식과 어윤중 등은 청나라에 ‘조선에 군대를 보내 국왕을 보호하고 난을 진압해달라’고 요청하였고, 청나라는 이번 기회에 종주국(宗主國)으로서 조선에 대한 기득권을 회복하고자 군대 파견을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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