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부패로 망하다 (39) -임오군란은 부패에서 발단했다.(2)
조선, 부패로 망하다 (39) -임오군란은 부패에서 발단했다.(2)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21.08.18 09: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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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6월 9일 오후가 되자 영세상인, 수공업자를 비롯한 도시의 하층민들과 다른 군영의 군인들도 대열에 합류했다.

이로당 (운현궁의 안채)
이로당 (운현궁의 안채)

시위대가 크게 늘어나자 군졸들은 좀 더 대담하고 조직적인 행동을 개시하기로 하고 대열을 셋으로 나누어 행동을 개시했다.

제1대는 종로를 휩쓸면서 포도청을 습격하여 갇혀 있던 김춘영·유복만·정의길·강명준 등을 구출하고 다른 죄수들도 풀어준 뒤, 다시 종각 앞에 있는 의금부를 습격하여 옥문을 깨뜨리고 모든 죄수들을 풀어주고, 상소를 올려 구속된 척사유생(斥邪儒生) 백낙관을 구출하여 가마에 태우고 동별영으로 돌아왔다. 군병들이 백낙관을 군중들 앞에 세우고 지휘할 것을 요청했으나 그는 거절했다.

군병들은 다시 강화유수 민태호를 비롯한 개화파들의 집을 습격하여 파괴했으며, 민왕후가 불공드리는 서울 근교의 주요 사찰을 밤늦도록 불질렀다. 항문이 막힌 원자를 5일 만에 잃은 민왕후는 1874년(고종 11) 2월 8일에 아들(나중에 순종)을 낳았다, 순종은 2세 때 세자에 책봉되었는데 병치레가 잦았다. 민왕후는 세자의 건강과 복을 비는 굿을 많이 했고, 팔도 명산을 두루 돌아다니며 제를 지냈다. 금강산 일만 이천 봉에는 쌀 한 섬, 베 한 필, 돈 천 냥을 공양했다.

한편 제2대는 별기군 훈련 장소인 남산 북쪽의 하도감(下都監)으로 갔다. 하도감에는 별기군 400명이 대부분 귀가하고 없었고 20여 명의 별기군과 일본 교관 몇 명만이 남아 있었다. 하층민들은 영관 정용섭을 죽이고, 교련장에서 구리개 쪽으로 달아가던 일본 교관 호리모토를 쫒아가서 때려 죽었다. 오후 3시쯤에 시위대는 남대문 근처 도로에서 일본인 3명을 발견하고 때려죽인 뒤, 이들을 구하려는 일본공사관 외무 순사 3명도 죽였다.

제3대는 서대문 밖에 있는 경기감영을 습격하였다. 경기도 관찰사는 김보현이었는데, 그는 전임 선혜청 당상으로 대표적인 부정 축재자였다. 그러나 김보현은 자리에 없었다. 군졸들은 감영을 파괴하고 무기고에서 무기를 꺼냈다. 이윽고 이들은 근처에 일본공사관 청수관으로 몰려갔다.

시위대는 일본공사관 정문을 돌파하려 했으나 일본 경비대의 방어에 부딪쳤다. 이윽고 시위대는 인근 집에 불을 지르면서 공사관을 협공했다. 이러자 1871년부터 통상업무를 본 하나부사 공사는 공사관에 불을 지른 다음 양화진을 거쳐 인천으로 달아났다. 다음 날 일본인들은 월미도에 숨었다가 영국 배를 타고 간신히 일본으로 도망쳤다.

동별영에서 밤을 세운 군졸들은 6월 10일 새벽에 왕십리를 비롯한 사대문 밖 및 성안의 백성들과 합세하여 더욱 강력해진 힘으로 조직적 활동을 개시했다. 이들의 목표는 민씨 척족의 최고 권력자 민왕후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군졸과 하층민들은 먼저 민왕후에 달라붙어 행세한 전 영의정 이최응(흥선대원군 이하응의 형)의 집을 습격하였다. 이최응은 담장을 타 넘다가 떨어져 불알이 터져 죽었다. (황현 지음 · 허경진 옮김, 매천야록, p 81)

이어서 시위대는 노상에서 민창식을 살해한 뒤 창덕궁 돈화문으로 몰려갔다.

성난 군졸과 하층민들이 창덕궁 돈화문으로 몰려가자 겁에 질린 수문장은 도망갔다. 군졸과 하층민들은 민생을 파탄 낸 민왕후부터 찾았다. 먼저 이들은 선혜청 당상 민겸호를 대궐 안에서 죽였다.

이어서 입궐하려는 경기감사 김보현도 때려 죽었다. 군졸들은 김보현의 시체를 발로 차면서 말했다.

“이놈은 돈을 좋아했으니 돈으로 배를 채워주자.”

군졸들은 김보현의 입을 찢어 엽전을 집어넣고 총대로 마구 짓누르니, 엽전이 갈비뼈 사이로 튀어나왔다고 한다. 군졸들은 그의 시신을 민겸호의 시신과 함께 궁궐 개천에 버렸다. 마침 큰 비가 와서 물이 불어 개천이 넘쳤는데, 날씨까지 흐리고 무더워서 시신이 버려져 있는 며칠 동안 살이 물속에 잠겨 하애졌다. 그것은 (짐승을) 잡아 놓은 것 같기도 하고 씻어 놓은 것 같기도 했다. (황현 지음·허경진 옮김, 매천야록, p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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