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부패로 망하다 (37) - 민씨 척족 정권 20년
조선, 부패로 망하다 (37) - 민씨 척족 정권 20년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21.08.02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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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4년 2월에 원자(순종)를 낳은 민왕후(1851∽1895, 1897년에 명성 황후로 추존)는 권력을 장악하였고, 민왕후의 오라버니인 민승호(흥선 대원군의 처남)가 민왕후의 명을 받들어 시행하였다. 여흥민씨 척족은 노론을 중용하였고, 대원군에 의해 등용되었던 남인과 북인들을 제거하였다.

홍릉(경기도 남양주시 소재,  고종 황제와 명성황후의 능)
홍릉(경기도 남양주시 소재, 고종 황제와 명성황후의 능)

“민승호가 집권하여 남인들을 완전히 도태시켰다. 어사들을 파견하여 남인, 북인및 대원군의 빈객(賓客)으로 있다가 수령이 된 사람의 파직을 거론하여 이들이 거의 다 사직하였다. 이때부터 남인들도 더욱 쇠퇴하여 어머니를 잃은 듯이 실의에 빠지게 되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황현, 국역 매천야록 1권, 대원군의 몰락과 남인의 도태)

민씨 척족 정치는 1895년에 민왕후가 시해당할 때까지 20년 이상 계속되었다.

“을미사변 이전까지 고종은 항상 누군가에게 의지해 살았다. 12살에 왕이 되었을 때는 대왕대비 신정왕후 조씨가 수렴청정을 했으며, 그 후로는 흥선대원군이 10년간에 걸쳐 섭정을 했다. 흥선대원군이 하야한 이후로는 명성황후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동안 결정적인 판단력과 추진력은 고종 자신이 아닌 신정황후 조씨, 흥선대원군, 명성황후 등에게서 나왔다. (신명호 지음,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역사의 아침, 2014, p 445)

민씨 척족들은 고종이 친정한 1874년부터 동학 농민전쟁이 일어난 1894년까지 20년간 정권을 잡았다. 이 시기엔 고종은 안 보이고 민씨 척족만 보였다. 민씨 정권은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다. 1기는 1874년부터 1884년까지, 2기는 1884년부터 1894년까지이다.

먼저 제1기이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이렇게 적었다.

“갑술년(1874년) 초에 고종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으나, 안으로는 민왕후가 주관하고 밖으로는 민승호가 명을 받들어 시행하였다. 민왕후는 총명한데다가 권모술수에 뛰어났다. 언제나 고종의 좌우를 떠나지 않고 고종이 미치지 못한 일을 도와주었다. 왕후는 비로소 고종을 빙자하여 애증을 마음대로 하다가, 얼마 지나 전횡이 날로 심하여 고종이 도리어 제재를 받았다.”

민씨 정권은 민왕후와 민승호(1830∽1874)가 그 중심이었다. 병조판서 민승호는 대원군이 물러나자 국정 주도권을 쥐었다. 그런데 민승호는 1874년 11월 28일에 의문의 폭발물 사고로 사망했다.

황현의 <매천야록>을 읽어보자

“민승호는 거상(居喪) 중에 있으면서 어떤 스님에게 조용한 곳에서 자기 아들을 위해 기도를 해 달라고 부탁하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밖으로부터 함 하나를 가져온 사람이, “기도하는 곳에서 왔습니다. 스님 말씀으로는 밀실로 가서 열어 보시라고 하였습니다. 이 속에는 복이 있으니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하게 하십시오” 라고 하였다

민승호는 함을 주고 간 사람을 찾았으나 그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민승호는 반신반의하였으나 일단 그의 말을 따랐다. 그 함에는 은밀히 구멍이 하나 있었다. 자물쇠가 채워져 있어 열쇠로 끌러야 했다. 그 자물쇠는 옆에 달려 있었다. 그는 시험 삼아 열쇠로 자물쇠를 끌렀다. 그 순간 ‘꽝’하고 불빛이 새어 나왔다. 그의 10세 된 아들과 할머니와 함께 죽은 것이다. 민승호는 튀어 나갔다가 떨어졌다. 그의 온몸은 숯덩어리처럼 시커멓게 타 있었고 벙어리가 된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런 그는 하룻밤을 지나고서야 사망하였다.”

민승호가 아들과 함께 죽자, 민왕후는 친정아버지 민치록의 제사를 받드는 후사를 물색했다. 민씨들 중 민겸호, 민두호, 민관호등이 자신들의 아들을 민승호의 양자로 세우려고 하였으나 민왕후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민왕후는 민태호(閔台鎬 1834~1884)의 외아들 민영익(1860∽1914)이 영리하여 마음에 들어했다. 하지만 민태호는 그 말을 따르지 않았다. 이때 그의 아우 민규호(1836∽1878)가 그를 설득했다.

“하늘의 뜻을 어찌 어기려고 하십니까? 양자를 보내어 함께 부귀를 누리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결국 민태호는 민규호의 말을 따랐고, 민영익은 민승호의 양자가 되었다. 1875년 8월 3일에 민규호는 이조판서로 임명되어 도통사(都統使)를 겸직하였다. 그런데 그는 고종과 민왕후가 직접 나서 벼슬을 팔게 한 장본인이었다. 1878년 10월에 우의정에 임명된 민규호가 갑자기 사망하였다. 이번에는 민승호의 친동생인 민겸호(1838~1882)가 정권 실세가 되었다. 그는 선혜청 당상 겸 병조판서로 국가 재정을 주물렀는데, 1882년 6월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구식 군졸들에게 살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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