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여름
그해 여름
  • 문틈 시인
  • 승인 2021.07.07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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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동안 나는 맨발로 땅을 밟아본 기억이 없다. 늘 구두를 신고 아스팔트 위를 걸어 다니며 살아 왔다. 아파트를 나서면 포장도로나 보도블럭, 시멘트 바닥이다. 맨 땅은 한 번도 디뎌보지 못한 채 수십 년이 흘러갔다.

다짜고짜 귀향버스를 탄 것은 순전히 맨발로 흙을 밟아보고 싶다는 일념 때문이었다. 갑작스런 나의 귀향을 부모님은 의아하게 생각하셨다. 회사일이 바쁘다며 자주 못 가 뵙던 나였다.

나는 아침 일찍 도시락을 싸들고 두 마장도 더 떨어진 수리조합으로 갔다. 평일이라 숲 속 호수에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옷을 벗어 호숫가 나뭇가지에 던져두고 물속으로 가만가만 들어갔다.

고요한 호수에는 나보다 먼저 파아란 하늘이 멱을 감으려 내려와 있었다. 해종일 나는 물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서 벗은 몸으로 호숫가를 걸어다녔다.

발바닥에 닿는 부드러운 흙의 감촉이 나의 살아 있음을 전율케 해주었다. 풀내음 흙내음이 공기를 뒤흔들었다. 머리 위에서는 한여름의 벌거벗은 태양이 지구를 향해 햇살로 짠 그물로 투망을 하고 있었다.

맨발로 흙을 밟으니 살 것만 같았다. 발가락 사이로 젖은 흙이 솟아나왔다. 땅으로부터 힘찬 기운이 발바닥, 장딴지, 허벅지, 허리, 머리끝까지 온몸으로 뻗쳐 올라오는 듯했다.

도시락을 까먹고 숲에서 뻐꾸기 울음을 들으며 해가 설핏할 때까지 호숫가에서 온몸이 흙투성이가 되도록 지냈다. 호수의 잔 물고기들이 몰려와 내 온몸을 쪼아댔다.

집으로 돌아오니 하루 종일 어디 갔다 왔느냐고 어머님이 물으셨다. 나는 저고리를 벗었다.

“시뻘겋게 탔구나, 껍질도 벗겨지고. 어떻게 된 것이냐?”

등짝이 몹시 따가웠다. 어머니가 수건에 찬물을 적셔 눌러주었다. 밤이 되자 온몸뚱어리가 불에 댄 것처럼 화끈거렸다. 어느 쪽으로도 따끔거려서 드러누울 수가 없었다. 나는 엉엉 어깨를 들썩이며 느껴 울었다.

어머니가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나는 막혔던 둑이 무너지듯 터져나오는 울음을 쏟아내고 말았다.

“서울 생활이 힘들어서 그러니?”

“아녜요, 어머니.”

“그럼, 애 엄마하고 다투기라도 했니?”

어머니가 물을수록 나는 어깨를 들먹이며 울었다. 한번 터진 울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내 가슴 어디에 그렇게도 많은 울음이 갇혀 있었던 것인지 몰랐다. 나는 이 돌연한 사태를 어머니께서 알아들으시도록 무어라고 설명할 수가 없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목 놓아 울어보았다. 생각해보면 독한 서울살이를 하느라 울어본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누가 죽었다고 해도, 누가 몹쓸 일을 당했다고 해도, 모진 마음으로 서울을 부딪치며 살아왔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내 마음을 모질게 다잡고 지냈다.

내가, 뜰의 장미꽃 한 송이가 지는 것을 보고도 서러워하던 내가 서울에 가서 독한 놈이 다 되어버린 것이다. 실컷 울고 났더니 비로소 고향에 안긴 듯 마음이 가라앉았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어머님께서 약국에서 붕산연고를 사가지고 오셨다. 어머님은 내 온몸에 하얀 연고를 발라주시며 말씀하셨다.

“얘야, 넌 이제 시골 사람이 아니야. 그렇게 마음이 어린애 같아서야, 원.”

“저를 용서해주세요. 제가 서울에서 오래 살다보니 서울놈이 다 되어버렸어요.”

그해 여름이 사무치도록 그립다. 잔물결 넘실대는 수리조합은 잘 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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