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길에서
산책 길에서
  • 문틈 시인
  • 승인 2021.06.17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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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일곱 시에 산책을 나간다. 복동이와 함께다. 유월의 아침 일곱 시는 상쾌하기 그지없다. 태양은 떠올라 있지만 아직 대지가 달궈지지 않은 참이라 공기는 살짝 선선하기까지하다. 길가 풀잎마다에는 간밤에 비가 왔는지 수은같은 이슬방울들이 맺혀 반짝인다.

복동이는 좋아서 목줄을 내당기며 뜀뛰기를 한다. 개울가로는 갯갈대들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고, 산책길에는 금계국, 개망초, 클로버, 그리고 풀꽃들이 여기저기 피어 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아카시아잎에서 잠자던 나비들이 인기척에 날아오른다.

올여름에는 노랑나비들이 눈에 뜨이지 않는다 했더니 노랑나비들이 눈앞에서 춤을 춘다. 산책길을 따라가는 개울 물소리가 귀를 씻는다. 마음을 어루만지는 드맑은 물소리다. 뭐라고 졸졸 지줄대는 것 같기도 하다.

먼 산골짜기에서부터 흘러내려오는 물은 징검다리를 지나 바다로 갈 터이다. 잠시 물의 여정을 생각해본다. 여울이 되었다가 폭포가 되었다가 소가 되었다가 시냇물로, 개울물로 마침내는 목적지인 바다에 이르게 될 저 물의 흐름에서 모든 것들의 행로를 짐작한다.

만물은 유전(流轉)한다고 옛사람은 갈파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영원한 것은 없다. 인생도 그러하다. 물이 바로 그 실체다.

산책길에는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사람들이 거의 안 보인다. 잠시 마스크를 벗어들고 폐부 깊숙히 공기를 들이마신다. 푸른 공기가 몸에 들어와 온몸을 풍선처럼 부풀게 하는 느낌이다. 마음이 고요하니 절로 시조 한 수가 떠오른다.

‘청산(靑山)도 절로절로 녹수(綠水)도 절로절로/ 산 절로 수 절로 산수 간에 나도 절로/ 그 중에 절로 자란 몸이 늙기도 절로 하리라.’(송시열). 세속을 초탈한 세계를 노래한다. 학문으로 이름을 떨친 송시열이 사약을 받고 죽는 장면을 떠올리면 이 시의 의미가 더욱 가까이 다가올 듯하다.

1689년 유배지 제주에서 한양으로 압송되어 가는 길에 정읍에서 사약을 받게 된 송시열은 그의 시조처럼 의연한 장면을 보여 준다. 서리(書吏)가 우암에게 ‘임금께서 약을 내리셨습니다. 약을 가지고 왔습니다’라고 하자 우암의 제자가 서리에게 ‘대감의 병환이 위중해 들을 수가 없으니 가까이 다가가서 크게 말씀해야 합니다’라고 했다.

이에 서리가 앞으로 다가가서 귀에 대고 다시 고하니, 우암이 곧바로 일어나 앉아 제자를 시켜 옷을 가져오게 해서 의관을 정제하고 사약을 받았다. 한 보시기를 마셨으나 운명하지 않으니 또 한 보시기를 청하고, 그래도 멀쩡하니 우암이 한 보시기 더 달라 해서 세 보시기를 마시고 그 자리에서 운명했다고 한다.

우리는 변화 속에 살고 있다. 대학자 우암은 절로절로 변하는 철리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죽음을 초월한 옛 선비의 비장한 장면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여름날 이른 아침은 모든 것들이 ‘절로절로’ 운행하는 듯한 그 속에서 마음이 가라앉고 다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물은 절로 흐르고, 나비는 잠을 깨어 절로 날고, 바람은 절로 불어 풀숲을 흔들고, 푸른 하늘에는 막 길을 떠나는 하얀 조각구름들이 절로 흐르고, 이보다 더한 천국이 또 어디에 있을까보냐.

어느 책에서 읽은 글인가, 아니면 이 칼럼에서 쓴 글인가, ‘지상에서 천국을 보지 못한 사람은 죽은 후에도 천국을 가지 못한다.’라고. 아침 일곱 시 넘어 산책길에서 잠시 천국의 모습을 본다. 모든 것들이 절로 되는 세상! 천국의 모습을 보려고 인간은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닐까. 인간이 전 생애를 통해 겪는 숱한 고통, 고뇌 가운데서 그 한 장면을 보려고 세상에 온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오늘 아침 이 고요하고 아름답고 평화스런 모습이 바로 그런 풍경이 아닐까.

복동이와 함께 한 산책길은 무려 90분이나 소요되었다. 시간이 어떻게 간 줄도 모르고 여름 아침에 푸른 기운에 이끌려 걷다보니 그리 되었다. 복동이는 지치지도 않는지 발걸음이 그대로다. 모를 일이지만 복동이도 이 시간이 되게 좋은 모양이다. 행복이란 것이 무슨 거창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아침 산책길의 느낌처럼 소소한 것들에서 느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욕심을 내려놓고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풀꽃들에 눈길을 보내고 하늘에 떠가는 구름 한 조각에 행복을 느낀다면 그것이 진정 행복이 아닐까. 우암처럼 절로절로 도는 세상과 일체가 되는 것. 그러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으리라.

책을 읽듯 자연을 바라보니 그런 생각이 든다. 개울에 철학자처럼 깊은 생각에 빠져 꼼짝 않고 있던 해오라기가 갑자기 무슨 깨달음을 얻었음인지 날개를 펴 하늘로 날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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