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부패로 망하다 (29) - 운양호 사건이 일어나다.
조선, 부패로 망하다 (29) - 운양호 사건이 일어나다.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21.06.07 09: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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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년 8월 20일(양력 9월 20일)에 강화도 조약의 빌미가 된 운양호(雲揚號) 사건이 일어났다.

운현궁에 전시된 조선 시대 연표
운현궁에 전시된 조선 시대 연표

이 날 일본 군함 운양호가 강화도 앞바다에 나타났다. 영국에서 건조된 운양호는 1875년 4월 20일에 부산에 입항하여 무력 시위를 한 바 있고, 이후 해로 탐사를 구실로 서해를 거쳐 강화도까지 올라갔다. 운양호 선원 일부가 보트를 타고 강화도로 접근하자, 강화도 초지진에서 포격을 가했다. 초지진 포대의 사정거리 밖에 있었던 운양호는 기다렸다는 듯 함포 사격으로 초지진을 박살 냈다. 일본 함포의 사정거리는 조선 화포의 10배나 되었다.

다음날 일본 해군은 영종도에 상륙하여 관아와 민가에 불을 지르고 살육을 자행하는 등 영종도를 초토화했다.

운양호 사건이 <고종실록>에 기록된 것은 1875년 8월 22일이 처음이다.

이 날 영종 첨사 이민덕이 ‘이양선(異樣船)이 난지도에 정박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8월 23일에 의정부가 아뢰었다.

"낯선 배가 내양(內洋)에 들어왔습니다. 역관(譯官) 몇 사람을 즉시 내려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낯선 배가 경기 연안에 와서 정박하고 있은 지가 이미 여러 날이 되었으나 외양(外洋)의 여러 고을에서 그 배가 지나간 형적에 대해 보고한 곳이 한 곳도 없으니, 어찌 이러한 변정(邊政)이 있겠습니까? 망을 보는 일이 이처럼 소홀하니 너무나 한심한 노릇입니다.

이 내용으로 우선 삼남(三南)과 양서(兩西)의 감사와 수사에게 게을리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지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러자 고종이 윤허하였다.

(고종실록 1875년 8월 23일)

이날 삼군부(三軍府)에서도 연해의 경계를 더욱 엄하게 하도록 경기 감사와 강화 유수에게 분부하도록 아뢰니 고종은 윤허하였다.

(고종실록 1875년 8월 23일 3번째 기사)

8월 24일에 삼군부에서 아뢰었다.

"경기의 연해에 정박하고 있는 낯선 배가 아직 어느 나라의 어느 지역 사람들인지 알 수 없으나 언제 내양(內洋)을 침범해 들어올지 예측하기 어려운데, 불을 지르고 포를 쏘아대니 더욱 가증스럽습니다.

항산도(項山島)에 불을 지르고 영종진에 포를 쏘아댄 일은 해당 방영(防營)에서는 장계조차 올리지 않았으니, 이보다 소홀한 것이 없습니다. 경기 감영에서 해당 진영에 즉시 통지하여 상황을 빨리 보고하게 하소서." (고종실록 1875년 8월 24일)

운현궁에 전시된 조선 시대 연표
운현궁에 전시된 조선 시대 연표

8월 25일에 경기 감사 민태호가 장계를 올렸다.

"방금 영종 첨사 이민덕의 보고를 받아보니, ‘저들의 배가 연기를 피우고 닻을 올린 후 앞바다로 내려오면서 연이어 포를 쏘아대는 바람에 전군(全軍)이 무너지고 화염이 성안에 가득하여 민가가 연이어 타면서 관아까지 불길이 미쳤기 때문에 전패(殿牌)를 모시고 토성(土城)으로 퇴군하였는데 죽거나 다친 군졸의 숫자를 아직 세지 못하였으며 첨사의 인신(印信)까지 재가 되고 말았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잠깐 사이에 온 성을 잃었으니 아뢸 말이 없습니다. 또 해당 첨사는 직책이 방어하는 데 있는 것인데 막을 생각은 하지 않고 성을 버리고 피신하였으니, 우선 파직하고 그 죄상을 물으소서"

(고종실록 1875년 8월 25일)

영종첨사 이민덕과 600명의 관민은 일본 해군 22명이 상륙하자 싸워보지도 않고 도주했다. 일본군은 조선군 35명을 죽였으며 17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또한 일본군은 조선대포 36문, 화승총 130여 자루 등을 약탈하였다. 일본 측은 전사 1명, 부상 1명이었다.

8월 26일에 삼군부에서 아뢰었다.

"영종도를 지켜내지 못했다는 보고가 방금 도착하였습니다. 많지도 않은 적도들이 함부로 날뛰도록 놓아두어 관청이 몽땅 불에 타버리고 한 놈의 괴수의 목도 베지 못한 채 밖으로 퇴각해 머물렀다고 하니, 영종첨사 이민덕을 파직시키고 정죄(定罪)하소서."

또 아뢰기를, "방금 경기 감사의 장계(狀啓)를 보니, ‘적선(賊船)이 방금 외양(外洋)으로 나갔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움직임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여 실상과 종적을 헤아리기 어려운 만큼 계엄하는 방도를 조금도 늦출 수 없습니다.

군사를 늘리고 군량을 보내는 방도를 경기 감사가 강화 유수와 함께 상의하여 견고하게 수비할 대책을 도모하게 하고 연해의 요충지들도 일체 단속하고 방어하도록 신칙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러자 고종이 윤허하였다.

(고종실록 1875년 8월 26일 1번째 기사)

조선 수군은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함대, 1871년 신미양요 때 미국 함대를 강화도에서 물리쳤다. 그런데 4년 만에 이렇게 무력해진 것이다. 고종이 친정하자 국방에 구멍이 크게 뚫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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