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부패로 망하다 (28) - 고종, 독단적으로 무위소를 확대하다.
조선, 부패로 망하다 (28) - 고종, 독단적으로 무위소를 확대하다.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21.05.31 09: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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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4년 6월 20일에 무위소(武衛所)가 창설되었다. 7월 3일에 고종은 무위소 대장을 신설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교했다.

창덕궁 인정문과 숙장문
창덕궁 인정문과 숙장문

이러자 영의정 이유원은 “이러한 문제들은 갑자기 의논하니 난처합니다. 다시 여러 번 생각하시고 대신들과 충분히 의논한 다음에 처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다음날인 7월 4일에 고종은 "무위소 대장을 국초(國初)의 도통사 제도를 본떠서 무위도통사(武衛都統使)로 하고 금위대장(禁衛大將) 조영하가 특별히 겸찰(兼察)하도록 하라."고 독단적으로 하교했다. 영의정의 의견은 아예 무시되었다.

7월 11일에 고종은 훈련도감, 금위영(禁衛營), 어영청(御營廳)의 표하군(標下軍)과 복마군(卜馬軍 기마대)을 무위소에 이속시켰다. 순식간에 정예 군사 828명이 증원된 것이다. 고종이 당초 예정한 숙위병 500명을 훨씬 넘었다.

7월 15일에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영의정 이유원이 아뢰었다.

"생각건대, 무위소 제도는 당초 성상의 뜻은 전하를 호위하고 대궐을 보위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갖추어 놓지 않은 벼슬자리가 없고, 하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어찌 이리 일을 크게 벌여놓은 것입니까? 이미 조처한 일을 비록 중지하기 어렵지만 따로 영문(營門)을 설치하는 일까지는 없어야 합니다."

이러자 고종이 하교하였다.

"이미 군액(軍額)이 있어 영솔하는 사람이 없을 수 없기 때문에 나누어서 책임질 직책을 약간 설치한 것이다. 처음에 부대를 두게 된 것은 그저 숙위 때문이었을 뿐인데 어찌 다른 일이 있었겠는가?"

이윽고 우의정 박규수가 아뢰었다.

"영의정이 방금 무위소에 관한 문제를 전하에게 진달하였습니다. 당초에 신 등은 너무 확대될 것 같아서 전하에게 진달한 바가 있는데 반드시 확대되지 않을 것이라는 뜻으로 성상의 하교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근일에는 뜻밖에 큰 부대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임금이 숙위하는 친위병을 두는 것은 못할 일은 아니지만, 이런 일은 여러 신하들에게 명하여 강구하고 마련하게 하여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혼자서 결단하였고,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지를 한번이라도 저희들에게 물어본 일도 없었기 때문에 모순되는 일들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박규수는 고종의 독단적인 일 처리에 크게 불만을 표시했다.

이어서 박규수가 말했다.

“바로 각 사(司)와 각영(營)의 서리들 중에서 일을 잘 아는 사람들을 선발하여 이속(移屬)시켜서 겸대(兼帶)하게 하였으니 어떻게 하여 그렇게 된 것입니까?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각 사와 각 영의 제반 사무에 대해서 수시로 하문하는 것이 간편하고 용이하므로, 전하의 생각은 아마도 여기에서 나온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각 사와 각 영에 모두 다 장관과 주관하는 장수가 있는 만큼 일반적으로 하문할 것이 있을 때 미천한 서리에게 물어보는 것은 부당합니다. 대소 경중을 막론하고 모든 명령의 출납(出納)은 원래 승정원(대통령비서실)이 담당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고요(皐陶)가 회답하는 노래로 순(舜)임금에게 아뢰기를, ‘임금이 총좌(叢脞)하면 고굉(股肱)이 게을러져 만사가 잘못되네.’라고 하였습니다. ‘총좌’라는 것은 번거롭고 자질구레한 것을 말합니다. 임금이 신하의 일을 하면 이것을 ‘총좌’라고 말하는데, 그렇게 되면 고굉의 보필은 자연히 할 일이 없게 되어 결국 만사를 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고종이 하교하였다.

“각 영과 각 사의 서리들이 합문에서 명령을 받게 한 것은 편리를 따랐기 때문인데 어찌 다른 일이 있겠는가?”

(고종실록 1874년 7월 15일 1번째 기사)

8월 28일에 고종은 훈련도감의 별파진(別破陣 : 화포(火砲)를 다루는 무관) 26명을 무위소로 이속시켰다. 무위소를 계속 증원시킨 것이다.

9월 26일에 우의정 박규수가 상소하여 사직을 청하자 고종은 사표를 수리했다.

10월 8일에 영의정 이유원도 사직을 청했다.

"뜻밖에도 우의정이 병을 이유로 사임함에 신이 혼자 남아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도 물러갈 것을 청한 사람입니다. 지금 명망이 높은 사람들이 조정에 널려 있으니 신과 같이 재능도 도량도 없는 사람을 마땅히 내쫓고 빨리 정승을 선택하소서“

이에 고종이 양해하라고 하면서 사직을 반려했다.

이어서 이유원은 무위소의 방만 운영과 군사들의 비행에 대하여 아뢰었다. 이에 대해 고종은 "군사들에 대하여 엄하게 단속하고 잡다한 비용을 절약할 것에 더욱 유념하겠다.”고 답했다.

(고종실록 1874년 10월 8일 1번째 기사)

하지만 이는 말뿐이었다. 이후 이유원은 여러 차례 사직을 청했지만 고종이 윤허하지 않았다. 이러자 이유원은 11월 29일에 임의로 도성을 떠나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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