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부패로 망하다 (27) - 고종, 궁궐수비대 무위소를 설치하다.
조선, 부패로 망하다 (27) - 고종, 궁궐수비대 무위소를 설치하다.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21.05.24 09: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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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이 친정한 지 5개월이 되는 1874년 4월 5일에 고종은 대신들과 차대(次對)를 주재했다. 차대는 고위 관료와 사헌부 · 사간원 · 홍문관의 관리가 만나는 정례회의이다.

창덕궁 희정당 (왕의 침전)
창덕궁 희정당 (왕의 침전)

고종 : “우리나라는 군사가 정예하지 않다. 대국(청나라)은 이와 같지 않다.”

영의정 이유원 : “언제나 군사는 양식이 넉넉하지 못한 것이 걱정입니다.병력증원은 군자(軍資 군사예산)을 마련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이유원은 고종이 청나라 화폐를 갑자기 폐지하여 국가재정이 힘들어진 마당이어서 군사 증원은 어렵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표시한 것이다.

일주일 뒤인 4월 12일에 고종은 또다시 병력증원 문제를 꺼냈다. 이유원은 호조와 병조 회의 결과 군량미가 7천 석이나 부족한 실정이라며 병력증원에 난색을 표시했다.

그런데 4월 25일 어전회의에서 고종은 마침내 본심을 드러냈다.

“궐내(闕內)를 수직(守直)하는 군병(軍兵)이 400명 밖에 안 되어 매번 부족하다고 염려해 왔다. 몇 명쯤은 증원하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반드시 접대할 비용을 마련할 방도를 세워야 할 것이다.”

고종이 말한 군사 증원은 국방강화가 아니라 궁궐 수비였다.

이러자 이유원이 아뢰었다.

"나라의 경비가 고갈된 것이 지금 같은 때가 없었습니다. 우선 재원을 마련해 놓고 그런 다음에 의논해야 할 것입니다."

고종은 즉각 대안을 제시했다.

"각영(各營)의 군병 가운데서 몇 명을 차출하여 궐내 가까운 곳에 입직(入直)하게 하면 어떻겠는가?"

이러자 이유원은 "이것은 신설(新設)하는 것과는 다르니 충분히 행할 수 있습니다."고 답했다.

고종은 말을 이어갔다.

"호조(戶曹)의 문서를 상고해 보니, 해당 군병들에게 쓰일 비용으로 부족한 것이 삼수량(三手糧)뿐이었다."

이유원 : "사실인 듯합니다."

고종: "선혜청(宣惠廳)의 미(米) 1만 석(石)이 잉여가 있다."

이유원 : "선혜청의 미환(米還)은 본래 부족합니다. 이것은 필시 그 청에서 지출하고 남은 것입니다."

고종: "조금 전에 말한 군병이 입직하는 문제는 연석에서 물러간 뒤에 상의하라."

이유원 : "삼가 하교를 받들어, 여러 장신(將臣)들에게 자세히 말하겠습니다."

(고종실록 1874년 4월 25일 1번째 기사)

4일 후인 4월 29일에 차대(次對)가 열렸다.

고종 : "일전에 하교한 파수군(把守軍)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유원 : "파수군의 수효는 지금 품정(稟定)해야 하겠습니다."

고종 : "파수군(把守軍) 500명은 4, 5번(番)으로 나누어 돌아가며 파수하게 하라. 궐내의 숙위(宿衛)가 매우 소홀하다. 지금은 원자(元子)도 있으니 더욱 신경을 써야 하므로 파수군의 수를 늘리게 된 것이다."

이유원 : “새로 숙위를 정하는 것은 폐단이 생길 수도 있으니, 신중하게 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고종실록 1874년 5월 5일 2번째 기사)

6월 9일에 차대를 행하였다.

영의정 이유원이 아뢰었다.

"지금 파수군의 군량을 따로 떼어낼 방도가 없는데, 대개 군사를 양성하는 방도는 먹을 것이 풍족해야 군사를 충분하게 훈련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신은 원래 서생(書生)이어서 군사에 관한 일을 배운 적이 없고, 또 재화를 다루는 재능도 없습니다. 그러니 모든 다른 방략(方略)도 재정을 책임진 신하와 군사를 거느린 신하를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파수군의 일로 말하면 그 내면을 살펴보면 이는 문을 지키고 야간을 경계하는 임무에 지나지 않는데, 외간에서는 이 일로 점점 더 의혹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고종 : "이것이 파수를 위하여 설치한 데 지나지 않으니, 제반 문제가 간편하게 되어 있는데, 외간에서 자꾸 의혹이 늘어가니 필시 내막을 몰라서 그런 것이다."

이유원 : "파수를 설치하는 것은 과연 처음 나온 제도입니다. 그러나 대궐문의 단속이 엄하지 못하여 간혹 함부로 들어오는 폐단이 있었습니다. 최근의 일을 놓고 보더라도 신문고(申聞鼓)를 치는 사람이 어떻게 이처럼 꼬리를 물고 이어질 수 있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차비문(差備門)의 파수뿐만 아니라 대궐문의 파수도 엄하게 단속해야 한다고 봅니다."

고종: "요즘 신문고를 치는 사람이 상당히 많아서 잡인들이 어려움 없이 대궐로 들어오니, 이것은 대궐문을 엄중하게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고종실록 1874년 6월 9일 1번째 기사)

6월 20일에 궁궐수비대 무위소가 정식출범했다.

“전교하였다. 파수군(把守軍)의 칭호를 무위소(武衛所)로 하되 훈련대장이 그대로 맡아보도록 하라."

(고종실록 1874년 6월 20일 3번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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