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부패로 망하다 (26) - 민씨 척족 정치와 부패
조선, 부패로 망하다 (26) - 민씨 척족 정치와 부패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21.05.17 09: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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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3년 11월(고종10)에 10년간 흥선대원군의 섭정이 끝나고 고종이 친정하자 민왕후의 척족들이 판을 쳤다. 다시 외척 정치로 회귀한 것이다.

경복궁 집옥재 일원
경복궁 집옥재 일원

1874년 2월에 원자(나중에 순종)를 낳은 민왕후는 권력을 장악하였고, 민왕후의 오라버니인 민승호(흥선대원군의 처남)가 민왕후의 명을 받들어 시행하였다. 노론의 핵심 가문인 여흥민씨 척족은 노론을 중용하였고, 대원군에 의해 등용되었던 남인과 북인들을 제거하였다.

“민승호가 집권하여 남인들을 완전히 도태시켰다. 어사들을 파견하여 남인, 북인및 대원군의 빈객(賓客)으로 있다가 수령이 된 사람의 파직을 거론하여 이들이 거의 다 사직하였다. 이때부터 남인들도 더욱 쇠퇴하여 어머니를 잃은 듯이 실의에 빠지게 되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타베이스, 황현, 국역 매천야록 제1권(1894년 이전), 대원군의 몰락과 남인의 도태)

민씨 척족정치는 1895년에 민왕후가 시해당할 때까지 20년 이상 계속되었다.

“을미사변 이전까지 고종은 항상 누군가에게 의지해 살았다. 12살에 왕이 되었을 때는 대왕대비 신정왕후 조씨가 수렴청정을 했으며, 그 후로는 흥선대원군이 10년간에 걸쳐 섭정을 했다. 흥선대원군이 하야한 이후로는 명성황후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동안 결정적인 판단력과 추진력은 고종 자신이 아닌 신정황후 조씨, 흥선대원군, 명성황후 등에게서 나왔다. (신명호 지음,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역사의 아침, 2014, p 445)

그렇다. 고종이 친정한 1874년부터 1895년까지 20년간을 ‘고종 시대’라 부르기보다는 ‘민씨 척족 시대’라고 부르는 역사가도 꽤 있다.

한편 고종과 민왕후는 지나치게 흥청망청했다. 구례에 살던 선비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대원군이 십 년간 모은 것을 일 년도 안 되어 모두 탕진했다.’고 기록했다.

“원자가 1874년 2월에 탄생하면서 궁중에서는 복을 비는 제사를 많이 벌였는데, 팔도 명산을 두루 돌아다니며 지냈다. 임금도 마음대로 잔치를 베풀었으며, 하사한 상도 헤아릴 수 없었다. 하루에 천금씩 썼으니 내수사의 재정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었다. 결국 호조나 선혜청에서 공금을 빌려 썼는데, 재정을 맡은 신하 가운데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따지는 자가 한 명도 없었다. 그리하여 대원군이 십 년간 모은 것을 일 년도 안 되어 모두 탕진했다. 이때부터 벼슬을 팔고 과거(科擧)를 파는 나쁜 정치가 잇달아 생겨났다.” (황현 지음·허경진 옮김, 『매천야록』, p 50, 54)

원자는 태어나면서부터 시름시름 앓았다. 항문이 없는 첫아들을 5일 만에 잃은 민왕후는 원자의 건강을 위해 무당을 불러 궁중에서 굿을 하고 전국 명산대천과 유명한 절에 기도처를 만들었다. 심지어 금강산 1만2천 봉의 봉우리마다 쌀 한 섬과 무명 한 필, 돈 100냥을 놓고 빌었다는 소문까지 떠돌았다.

더구나 양전(고종 부부)은 유흥을 즐겨 매일 밤 연회를 열고 질탕하게 놀았다. 광대, 무당과 악공들이 어울려 노래하고 연주하면 고종 부부는 손뼉을 치고 좋아하였는데, 접부채와 세모시·인삼 등 진귀한 물건들을 비 오듯 던져주었다. 밤새 계속된 연회는 새벽이 돼서야 끝났다. 그때야 양전은 잠자리에 들어 한낮이 돼서야 일어났다.

실제로 민왕후는 1875년경부터 지방 수령 자리를 돈 받고 팔았다.

“중전은 공을 들이고 비는 일에 절제가 없고 물품의 하사도 적지 않아 돈이 한량없이 들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수령 자리를 팔기로 마음먹고 민규호에게 전국의 수령 자리의 값을 매겨 올리도록 하였다. 민규호는 지방 수령의 관직은 팔 수가 없다고 판단하고 응모자가 없도록 하려고 1만 냥짜리 자리를 2만 냥으로 올려서 중전에게 아뢰었다. 하지만 이 가격에도 수령을 하려는 지원자가 엄청 많았다. 그리하여 부임하는 수령들은 가렴주구를 일삼아 백성들이 더욱 곤궁해졌다. 그때야 민규호는 후회했다.” (황현 지음·임형택 외 옮김, 역주 매천야록(상), 2005, p96)

1874년 11월에 민승호가 의문의 폭발물 사고로 사망하자 민규호(1836∽1878)가 민씨 척족의 실세가 되었다.

1875년 8월에 이조판서에 임명된 민규호는 고종에게 ‘벼슬 시킬 사람을 붉은 종이에 써서 이조에 내려주면 추천자 명단에 올리겠다.’고 은밀히 아뢰었다. 고종은 이 방법이 마음에 들어 중전과 의논해 벼슬 시킬 사람을 서하(書下)했다. 이는 조선왕조가 실시해 온 의망(擬望 : 이조가 3명의 후보를 올리면 임금이 낙점) 제도를 무너뜨린 낙하산 인사였다.

심지어 관리들은 참봉·감역 등 초임(종9품) 벼슬도 팔았다. 심지어 충청도의 늙은 과부가 데리고 사는 ‘복구(福狗)’라는 개에게 감역(監役 건축 토목공사 감독) 벼슬을 파는 해프닝도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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