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부패로 망하다 (25) - 고종, 만동묘를 부활시키다.
조선, 부패로 망하다 (25) - 고종, 만동묘를 부활시키다.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21.05.10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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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3년 11월 15일에 부사과(副司果) 강운중이 만동묘(萬東廟) 복구를 상소했다.

경복궁 강녕전 (왕의 침전)
경복궁 강녕전 (왕의 침전)

고종이 친정하자마자 상소한 것이다. 이는 최익현의 상소와 맥을 같이 했다. 고종은 "만동묘에 대한 문제는 지금 거론할 필요가 없다."고 비답했다. (고종실록 1873년 1월 15일 1번째 기사)

11월 24일에 홍문관 수찬 권익수가 상소를 올려 만동묘 복구를 청했다. 고종은 다시 거론하지 말라고 비답했다.

12월 1일에도 전 경연관 임헌회가 만동묘 부활을 청했다.

“신이 벼슬에 나가지 않으니 드릴 말이 없지만 만동묘 한 가지 일에 대해서는 신이 외람되게 명(明)나라의 유민으로 자처하고 의견을 아뢴 적이 있었습니다. 만동묘에 대해서는 대왕대비에게 여쭈어 처리해도 무슨 누(累)가 되겠습니까? 전하께서 단안을 내려서 속히 제사를 회복하도록 명하시기를 신은 간절히 바랍니다.” (고종실록 1873년 12월 1일 2번째 기사)

12월 19일에는 청산(靑山)에 사는 유학(幼學) 이병규 등이 상소하였고, 12월 24일에는 부사과 정극상이 만동묘 복구를 청했다. 하지만 고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경복궁 교태전 (왕비의 침전)
경복궁 교태전 (왕비의 침전)

1874년 2월 8일에 민왕후가 원자(나중에 순종)를 낳았다. 항문 없는 큰 아들이 낳은 지 5일 만에 죽었으니 원자 탄생은 더 없는 경사였다.

구례에 사는 선비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이렇게 적었다.

“갑술년(1874) 2월에 원자가 탄생하였다 3월에 증광시(增廣試)를 설치하여 대과와 소과 급제자를 선발하고, 을해년(1875)에 세자로 책봉하였다.”

한편 2월 9일에 충청도 보은의 유생 조영표등, 2월 11일에 충청도 회덕의 유생 송헌기가 만동묘 복구를 상소하였다. 하지만 고종은 "물러가 학업을 닦으라."고 비답하였다.

그런데 2월 13일에 고종은 만동묘에 봉향하는 의절을 다시 설치하여 거행하라고 전교했다.

“이미 자전(慈殿)의 하교를 받았다. 만동묘에 봉향하는 의절은 다시 설치하여 거행하라. 황단(皇壇)을 처음 세운 것이 설사 사림들에게서 나왔지만 정조조(正祖 朝)의 사액을 봉안한 뒤로는 사체가 자연히 달라졌으니, 이번에 다시 설치하는 것은 조정에서 주관하겠다.” (고종실록 1874년 2월 13일 1번째 기사)

1865년에 철폐된 만동묘는 대원군 하야 후인 1874년 2월에 부활되었다. 9년 만의 일이었다. 이 일은 민왕후 일파가 최익현과의 약속을 지킨 것이고, 유생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취한 조처였다.

그런데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에 세워진 만동묘는 여흥민씨와 인연이 깊다. 만동묘의 시초는 민정중(1628∽1692)이다. 민정중은 북경에 사신으로 갔다가 명나라 의종(毅宗)의 친필인 ‘비례부동(非禮不動)’ 넉 자를 얻어다가 스승인 송시열에게 주었다. 1674년에 송시열은 이것을 화양리에 있는 절벽에 새겼고, 1689년에 송시열이 사사(賜死)될 때 신종과 의종의 사당을 세워 제사 지낼 것을 제자 권상하에게 유명(遺命)으로 부탁하였다.

이에 따라 권상하는 1703년 정호·이선직과 함께 부근 유생들의 협력을 얻어 만동묘를 창건하고 신종과 의종의 신위를 봉안하여 제사 지냈다.

그런데 민정중은 민유중의 친형이다. 민유중(1630∽1687)은 숙종 비 인현왕후의 부친으로서 민왕후의 직계 조상이었다.

한마디로 여흥민씨 집안은 골수 노론 집안이었다. 여흥민씨의 득세로 노론이 중용되었고, 다시 송시열의 시대가 열렸다.

한편 만동묘 부활 후 한 달이 지난 3월 6일에 충청도의 유생과 유학(幼學) 이고익 등 184인이 상소하여 화양서원의 복구를 청했다.

"전하께서 자전(慈殿)의 하교를 받들어 만동묘를 복구하신 것은 매우 훌륭한 일입니다. 대개 황묘(皇廟)를 설치한 것은 선정신(先正臣) 송시열에 의하여 의기(義起)되었고, 화양서원(華陽書院)을 세운 것도 일체로 제사를 올리는 의리에서 나온 것이니, 황묘만 복구하고 서원(書院)을 복구하지 않으면 사당(祠堂)을 가까이하는 의리에 어긋나게 될 것입니다. 빨리 신들의 요청을 허락하소서."

이러자 고종이 비답했다.

"이미 며칠 전에 지방에서 올린 상소에 대한 비답에서 하유(下諭)하였는데 또 이렇게 시끄럽게 굴고 있으니, 이것이 무슨 사체(事體)인가? 물러가서 학업을 닦도록 하라." (고종실록 1874년 3월 6일 1번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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