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부패로 망하다 (24) - 청전 폐지의 여파
조선, 부패로 망하다 (24) - 청전 폐지의 여파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21.05.03 13: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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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4년 1월 13일에 어전회의가 계속되었다. 청나라 돈이 폐지된 지 1주일이 지난 뒤였다.

운현궁 노안당
운현궁 노안당

고종 : "어제 평안도의 곡총(穀摠 곡물 문서)을 보니, 환곡은 미처 기록에 넣지 않았다."

호조판서 김세균 : "환곡은 이자를 불린 후에 곡부(穀簿)에 기록합니다. 그래서 작년에는 미처 기록에 넣지 않은 것 같습니다.“

환곡은 봄에 종자를 빌려주고 가을에 종자와 이자를 곡식으로 거두는 제도이다.

우의정 박규수 : "관서 지방의 환곡 폐단은 해가 갈수록 더욱 심해져서 크게 백성들의 걱정거리가 되었습니다. 곡총은 한성에 있는 관청에서 옛날 규례대로 기록하고 있는데 실제는 허깨비 문서에 불과합니다. 주상께서 열람하신 곡총에는 실제로 1포(包)의 곡식도 없습니다."

고종 : "나는 곡식이 있는 줄로 알았다."

참으로 황당하다. 도대체 고종은 제대로 알기나 알고 청전을 폐지했을가? 무능하다는 생각만 든다.

(고종실록 1874년 1월 13일 2번째 기사)

1월 17일에 어전회의가 다시 열렸다. 의제는 역시 재정문제였다.

고종은 영의정 이유원에게 하교하였다.

"사창(社倉)에 보관 중인 환곡은 돈으로 바꿀 수 있는가?"

사창은 흥선대원군이 환곡의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1867년에 각 지방에 설치한 기관이다. 백성에게 저리로 곡식을 빌려주는 구호기관 역할을 했다.

운현궁 노안당 안내판
운현궁 노안당 안내판

그런데 고종은 사창에 비축된 곡식마저 재정 궁핍을 메꾸기 위해 돈으로 환전하고자 한 것이다. 백성은 안전(眼前)에도 없다.

이러자 영의정 이유원이 아뢰었다.

"사창이 설치된 지 얼마 되지 않는데, 병인년(1866) 별비환이 그 가운데 뒤섞여 들어가 있어 이것도 갑자기 의논하기 어렵습니다."

병인년 별비환은 고종 3년인 1866년 5월에 지방 관리들의 농간으로 환곡이 감소하자, 대원군이 폐단을 막기 위하여 각도에 30만 냥을 내려 보낸 환곡 종자 돈이다.

이어서 고종이 하교하였다.

"일체 돈으로 바꾸어야 한다. 별비환은 설치한 본의가 백성과 나라를 위한 것이었는데, 도리어 고질적인 폐단이 되었다.”

이유원이 다시 아뢰었다.

"환곡은 수재나 한재(旱災) 등 뜻밖의 일에 대처하기 위한 것인데, 모두 돈으로 바꾸어 버린다면 장구한 계책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유원은 고종의 계책이 마땅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천재지변 자금을 일상 경비로 끌어다 쓰다니.

고종이 다시 하교하였다.

"환곡을 설시한 본의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도리어 간사한 아전들이 농간을 부려 한갓 종이쪽지의 공문(空文)만 있을 뿐이고 곡식은 없기에 이르렀으니 어떻게 하겠는가?"

이유원이 아뢰었다.

"신이 여러 번 방백(方伯)을 지냈기 때문에 환곡의 폐단을 익숙히 알고 있으나 사실 배제할 대책이 없습니다. 우상(박규수)이 오늘 연석에 나오지 않았는데 상의하고, 원임 대신에게 문의한 다음 별도로 보고하겠습니다."

이러자 고종은 "그대로 하라. 별도로 보고하라."하였다.

이럭저럭 청나라 돈이 철폐된 지 2주일이 흘러갔다. 1월 20일의 어전회의에서 고종은 다시 청전 문제를 꺼냈다.

"상평전(常平錢)이 들어온 양을 보니, 100만 냥이나 된다. 그런데 별단에 있는 청나라 돈 200만 냥은 처리할 방도가 없으니 답답한 일이다. 나라에는 경비로 쓸 것이 없고 또 민간에서 걷어 들일 수도 없으니, 환곡을 돈으로 바꾸는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

다시 영의정 이유원이 아뢰었다.

"전에도 나라의 비용이 매우 곤란하였을 때에는 이런 사례가 많았습니다. 지금은 곡식 장부가 텅 비어서 손쓸 대책이 없습니다."

고종 : "환곡에 대한 탕감(蕩減)은 바로잡아 놓은 다음에도 있었는가?"

이유원 : "그렇습니다."

고종 : "호조의 경비가 매우 군색하니 경복궁 공사는 당분간 그만둘 것이다. 시어소(時御所)도 수리할 곳이 많지만 사실 어찌할 도리가 없다."

(고종실록 1874년 1월 20일 1번째 기사)

2월 5일에 고종은 하교하였다.

"고을에서 상평전으로 징세하고 나라에는 어째서 청나라 돈을 바치는가?"

이유원이 아뢰었다.

"호조와 선혜청에 자세히 물어본 뒤에 처리하겠습니다."

(고종실록 1874년 2월 5일 1번째 기사)

청전 폐지로 물가가 폭등한 가운데 백성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상평통보를 구해서 관아에 세금을 냈다. 그런데 지방관리들은 그 상평통보를 자기가 챙기거나 지방 관아 곳간에 쌓아두고 세금을 청전으로 중앙정부에 바쳤다. 이게 바로 부패이고 농간이었다. 나라가 위아래로 썪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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