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부패로 망하다 (22) - 경복궁에 화재가 발생하다.
조선, 부패로 망하다 (22) - 경복궁에 화재가 발생하다.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21.04.19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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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3년(고종 10년) 11월에 대원군의 10년 섭정이 끝낸 고종은 친정하였다. 그런데 12월 10일에 경복궁 자경전(慈慶殿 대왕대비의 처소)에 화재가 발생하였다. (고종실록 1873년 12월 10일 2번째 기사)

자경전
자경전

친정 시작부터 매우 불길한 조짐이었다.

이러자 고종은 영의정 이유원을 즉시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이유원은 고종이 어렵게 임명한 영의정이었다. 고종은 11월13일에 영부사(領府事) 이유원을 영의정에 임명하였는데 이유원은 여러 번 사양하였다. 11월 27일에 고종이 이유원에게 다시는 사양하지 말라고 강력히 말하자 그때야 영의정을 수락했다.

당시에 고종의 정승 임명은 꼬였다. 12월 2일에 우의정에 임명된 박규수는 계속 사양하고 있었고, 좌의정은 임명조차 못했다.

박규수는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서, 1862년 임술민란 때 안핵사를 하여 삼정 개혁을 철종에게 건의한 바 있고, 1866년 평양감사 때는 미국 배 제너럴 셔먼호를 격침시킨 신망받는 신하였다.

이 날 고종이 하교하였다.

"오늘의 화재는 전에 없는 재변이고 순식간에 그렇게 번졌다."

이유원 : "이번의 화재는 정말 뜻밖입니다. 생각하건대 자전께서 너무도 몹시 놀라셨을 것이니 애타는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고종 : "궁전이 화재를 당하여 거처할 만한 곳이 없게 되었으니 빨리 동궐(東闕 창덕궁)에 옮겨가도록 조치하라."

이유원 : 지당한 말씀입니다. 모두 불타버린 뒤 머무실만한 곳이 없으니 동궐로 이어(移御)하는 것을 조금도 늦출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궁전을 중건하는 일은 내년 봄에 가서 의논하여 결정해도 늦지 않을 듯합니다."

이윽고 고종은 박규수에게 "우의정이 조정에 나왔으니 국사에 매우 다행이며 내 마음도 몹시 흐뭇하다."고 덕담을 했다.

그러나 박규수는 다시 사양하였다. 고종은 “지금 재변이 발생하였으니 진실로 나를 안심시키려면 다시는 거론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나를 안심시키는 길이다."라고 뼈 있는 말을 했다.

이러자 박규수는 "전하의 분부가 이러하니 지난날과 오늘을 돌아보면 신은 저도 모르게 감격의 눈물이 줄줄 흐릅니다. 삼가 명을 받들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고종실록 1873년 12월 10일 3번째 기사)

경복궁에 화재가 난 열흘 뒤인 12월 20일에 대왕대비, 왕대비, 대비, 왕비가 창덕궁으로 이어하였다.

경복궁 교태전 (왕비의 처소)
경복궁 교태전 (왕비의 처소)

한편 1874년 1월 6일에 고종은 청전(淸錢 청나라 돈) 폐지를 전격적으로 단행했다.

“청나라 돈을 당초에 통용한 것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물건은 귀해지고 돈은 천해져 지탱할 수 없다고 한다. 백성들의 형편을 생각하면 비단 옷과 쌀밥도 편안하지 않다. 이제부터는 청나라 돈 통용을 전부 혁파(革罷)하고, 모든 세금은 상평전(常平錢)으로 거두어라." (고종실록 1874년 1월 6일 1번째 기사)

대원군은 경복궁을 중수할 때 원납전(願納錢)이 부족하여 1866년 봄에 당백전(當百錢)을 발행하였다. 그러나 물가가 앙등하고 위조범(盜鑄者)도 많이 발생하여 1867년에 폐지하였다. 그리고 1867년 6월에 청나라의 소전(小錢)을 시중에 유통시켰다. 그런데 당백전과 마찬가지로 청전 유통에 부작용이 나타났다. 물가가 상승한 것이다.

이러자 의정부에서 아뢰었다.

"청나라 돈을 혁파하고 상평전으로 2월부터 상납할 일을 방금 하교를 받들어 팔도와 사도(四都)에 통지하였습니다. 이는 백성을 위한 성상의 뜻이니 누군들 우러러 받들지 않겠습니까만, 필요한 경비가 모자라게 되는 것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호조와 선혜청 및 각 군영에 알려서 서울과 지방의 관용물품 수요와 관리들 봉급을 일단 조사부터 하라고 지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러자 고종이 윤허하였다. (고종실록 1874년 1월 6일 4번째 기사)

의정부는 청전 폐지로 인해 정부 출납의 문제가 우려됨을 조심스럽게 아뢰었다. 고종은 청전의 전격 폐지가 경제에 미치는 파장과 부작용이 어떨지를 알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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