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시대 지방관 청렴 기린 순천 ‘팔마비’ 보물로 승격
고려 시대 지방관 청렴 기린 순천 ‘팔마비’ 보물로 승격
  • 박병모 기자
  • 승인 2021.03.23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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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와 달리 옥개석 없고, 비석 받침돌 연화문 특징
공주 갑사 대웅전·의성 대곡사 범종루도

고려 시대 지방관의 청렴을 기린 '순천 팔마비'가 전남 유형문화재에서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승격됐다.

순천 팔마비 / 문화재청
순천 팔마비 / 문화재청

팔마비는 옥개석(지붕돌), 비신(碑身), 비석 받침돌을 갖춘 조선 시대의 일반적인 비와 달리 비신 위에 옥개석이 없고, 비석 받침돌에는 연화문(蓮華文)이 새겨져 있다는 게 특징이다.

문화재청은 23일 전남 순천에 있는 팔마비를 비롯 공주 갑사 대웅전과 의성 대곡사 범종루 등 지방 유형문화재 3건을 보물로 지정했다고 밝혔다.
순천 팔마비는 고려시대 충렬왕 7년인 1281년 이후에 승평부사(昇平府使) 최석(崔碩)의 청렴함을 기리기 위해 승평부(지금의 순천)에 세운 비석이다.

고려사 열전(列傳)에 따르면 승평부에서는 수령이 바뀌면 말 8필을 기증하는 관례가 있었는데, 최석은 비서랑의 관직을 받아 승평부에서 기증한 말을 타고 개성으로 떠난 후, 기증받은 말과 자신의 말이 승평부에 있을 때 낳은 망아지까지 합해 돌려보냈다.
이후 승평부에서는 임기를 마치고 떠나는 수령에게 말을 기증하는 폐단이 사라졌고, 읍민들은 최석의 청렴함을 기리기 위해 팔마비를 세웠다고 기록돼 있다.

순천 팔마비 앞면과 뒷면, 탁본(왼쪽부터)
순천 팔마비 앞면과 뒷면, 탁본(왼쪽부터)

비석은 고려말 처음 건립됐으나 1300년대 초반 쓰러졌다가 다시 세워졌다. 이후 정유재란 때인 1597년 완전히 훼손됐으며, 1616년 순천부사로 부임해온 이수광이 이듬해 재건했다.
이수광이 중건한 비석의 '八馬碑'(팔마비) 세 글자는 진사 원진해의 글씨다.
뒷면에 새긴 글은 이수광이 짓고 동지사(同知事·관직의 하나) 김현성이 글씨를 썼다.

이와함께 충남 유형문화재에서 보물로 승격된 '공주 갑사 대웅전'은 정유재란 후 갑사에서 가장 먼저 재건된 건축물 중 하나다. 여러 차례 중수됐지만 대체로 원형을 유지해 온 것으로 추정되는 건축물이다.
대웅전 내부의 '갑사소조삼세불'(보물 제2076호)이 1617년에 제작됐고, 1659년에 '갑사사적비'가 세워져 17세기 초에 건립된 것으로 여겨진다.
문화재청은 17세기에 지어진 다포계 맞배집의 전형적인 형식을 공유하며 조선 후기 건축 경향을 제안하고 있다는 점에서 건축사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했다.

경북 유형문화재에서 보물이 된 '의성 대곡사 범종루'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전소돼 1644∼1683년 사이에 중창됐다고 전해지는 정면 3칸, 옆면 3칸의 2층 누각 건물이다.
문화재청은 "의성 지역의 불교 사찰이 부흥하기 시작한 17세기의 양식적 변화를 잘 간직하고 있는 문화유산으로서 누각 건축의 변천 과정을 살필 수 있는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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