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215) 규원(閨怨)
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215) 규원(閨怨)
  • 장희구 시조시인/문학평론가
  • 승인 2021.03.15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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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썹 같은 초승달 서쪽 연못에서 떠오른다 : 閨怨 / 양사기 소실

여인이 쓴 시의 대체적인 경향을 보면 멀리 가 있는 임에 대한 그리움을 담고 있다. 그것도 직설적인 표현이 대부분이며 은유적이며 우회적으로 쓴 경우는 많이 드물었다. 시인은 규방의 원망이었다면 황진이처럼 보름달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 이불 아래 넣었다가 굽이굽이 펴리라고 표현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지 않았다. 서풍이 불어오니 오동나무 가지가 흔들리고, 하늘은 아득한데 기러기는 느릿느릿 날아간다고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閨怨(규원) / 양사기 소실

서풍이 불어오니 오동가지 흔들리고

하늘은 아득한데 기러기는 느릿느릿

창가에 눈썹 같은 달 연못에서 떠오르네.

西風摵摵動梧枝 碧落冥冥雁去遲

서풍색색동오지 벽락명명안거지

斜倚綠窓仍不寐 一眉新月上西池

사의녹창잉불매 일미신월상서지

눈썹 같은 초승달 서쪽 연못에서 떠오른다(閨怨)로 제목을 붙여본 칠언절구다. 작가는 양사기 소실(楊士奇 小室:?∼?)인 여류시인이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서풍이 불어오니 오동나무 가지가 흔들리고 / 하늘은 아득한데 기러기는 느릿느릿 날아가는구나 // 푸른 창가에 가만히 기대어 보니 잠은 오지 않고 / 눈썹 같은 초승달이 서쪽 연못에서 떠오르네]라는 시심이다.

위 시제는 [규방의 원망은 깊어만 가고]로 번역된다. 조선 여인의 한과 눈물은 대체적으로 규방의 원망으로 노출되는 규원閨怨이 대종을 이루었다. 만나고 싶은 임을 만나지 못하고, 온다는 기약도 없었으니 시문으로나마 그 시름을 달랬다. 글줄이라도 읽을 수 있었던 여인은 그 시름을 시상으로나마 달랬겠지만, 그렇지 못한 여인네의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시인은 원망의 정도가 심했을 것이란 생각을 하는 시상이 저 멀리 임이 달음질치면서 오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서풍이 서서히 불어오니 오동나무 가지가 흔들리고, 하늘은 아득한데 기러기는 느릿느릿 날아간다는 선경先景의 시상이다. 매서운 한파가 몰아친 북풍이 불다가 서풍을 타고 봄이 오는 길목이었던 모양이다. 화자는 밤이면 밤마다 뒤척거리면서 잠을 청하지 못하고 푸른 창에 몸을 기대어 임을 기다렸음을 보인다. 푸른 창가에 기대어 보니 잠은 오지 않고, 눈썹 같은 초승달이 서쪽 연못에서 떠오른다는 시상의 그림을 그려놓았다. 임을 기다린다는 말은 한 마디도 없다. 오직 눈에 보이는 자연의 정경을 비유법으로 덧칠한 시상을 일구어 냈다.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서풍 불어 오동 흔들고 기러기 느릿느릿, 푸른 창가 기댔더니 초승달이 떠오르네’라는 시인의 상상력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

장희구 시조시인/문학평론가.
장희구 시조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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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양사기소실(楊士奇 小室:?∼?)인 여류시인으로 그 생몰연대와 자세한 행적은 알 수 없다.

【한자와 어구】

西風: 서풍. 摵摵:: 앙상하다. 動梧枝: 오동나무 가지가 흔들리다. 碧: 하늘. 落: 떨어지다. 冥冥: 아득하다. 雁去遲: 기러기가 느리게 날아가다. // 斜倚: 기대어 보다. 綠窓: 푸른 창가. 仍不寐: 이내 잠은 오지 않다. 一眉: 하나의 눈썹. 新月上: 초승달이 떠오르다. 西池: 서쪽 연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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