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의 맛
전라도의 맛
  • 문틈 시인
  • 승인 2021.03.11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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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나리무침을 좋아한다. 미나리를 뜨거운 물에 데쳤다가 바로 찬물에 담가 물기를 짜내고 싹둑 잘라서 거기에 고추장, 마늘씨, 깨, 식초를 알맞게 넣어 버무린다. 여기에 살짝 데친 세발낙지를 넣어 무치면 제 격이다.

이제는 아내가 만들어 준 미나리무침도 먹을 만하다. 미나리무침은 경상도 아내가 맛을 내기에는 시간이 좀 필요했다. 대개는 내가 무친다. 나는 겉절이도 매우 좋아한다. 봄눈을 뒤집어쓰고 밭에 옹송거리고 있는 푸른 배춧잎을 솎아 와서 만든 싱싱한 봄동겉절이는 맛보기도 전에 입 안에서 침이 돈다. 어떤 땐 아내가 아주 짜게 만들어서 내 두 눈을 감기게도 하지만 그래도 어머니께서 만들어 주신 맛에 방불하다.

나는 김을 좋아한다. 언젠가 아내가 웬 김을 그리 좋아하느냐고 타박을 주길래 내가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고 싶다면 김맛을 못잊어서 일 것이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아내도 나랑 오래 살아온 탓인지 지금은 김 마니아가 되었다. 값이 싼 김일수록 오히려 나는 더 좋아한다.

파래가 조금 섞여 있는 김을 불 위에 살짝 구울 때 나도는 김 향기는 무어라고 표현하기 어렵다. 나는 맨입에 김을 뜯어 맛을 본다. 그 쌉쓰레한 맛이라니. 김을 굽는 내음은 내가 세상에 살아 있다는 기쁨을 진동케 한다. 그 내음을 굳이 비유하자면 내가 저 멀리 20대 시절 1박2일로 가서 이따금 수평선만 보고 돌아오던 남도의 그 푸른 바다를 굽는 맛이랄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의 목록은 더 있다. 조기새끼 구이, 황새기젓, 병어회, 감태무침, 생굴, 고구마순무침, 냉이무침, 미역국, 무국, 보릿국, 냉오이국, 콩나물밥, 가지나물, 시금치나물, 쑥국, 두부를 잘게 썰어 넣은 된장국, 열무김치, 동치미……. 이런 등속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은 고급요리에 들어가는 것은 한 가지도 없고, 내 어릴 적부터 먹었고, 지금도 좋아하는 소울 푸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타관 생활 수십 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내 입맛은 고향에서 떠나지 못하고 있다. 한겨울 시골 어머님께 전화를 걸어 솎음보리잎을 부쳐주시라고 할 때도 있다. 겨울 보릿국은 전라도 사람의 정체성을 지켜주는 영혼의 음식이다. 엊그제 시골 사시는 어머니가 무청시래기 데친 것을 냉동상태로 부쳐주셨다. 된장, 고추, 멸치, 무청시래기를 넣어 국을 끓이면 맛이 그만이다.

평생을 같이 살아도 도무지 고향의 맛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한 나를 아내는 내심 못마땅해 하는 눈치다. 어린 시절에 먹던 맛이 유전자에 새겨져 있는지 나로서도 어쩔 수 없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요리하기가 너무 간단하고 값싼 것들인 데다 식재료 자체가 갖고 있는 싱싱한 맛에 전라도 손맛이 스며들어 환상의 맛을 낸다.

해남 출신 시인 이동주(李東柱) 선생은 생전에 내가 고향에 간다고 하자 입맛을 다시면서 감태를 부탁한 일이 있다. 나는 일부러 망운까지 가서 감태를 한 깡 구해다 드렸다. 아마 두어 달간은 좋이 드셨을 것이다. 감태는 모르긴 몰라도 망운 바다에서 나온 것이 으뜸이다.

감태맛을 알게 된 서울사람들 중에는 감태를 물에 깨끗이 씻어가지고 양념을 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는 모양이지만 그건 아니올시다다. 감태에서 망운바다를 씻어내 버리면 감태 특유의 쌉쓰레한 맛과 바다 향기가 사라져버린다. 감태를 맹물에 살짝 씻는 시늉만 하고 건져내야 한다. 먹을 만치 감태를 덜어내 마늘씨, 고춧가루, 깨, 참기름, 간장, 생파 잘게 썬 것을 가지고 섞으면 된다. 남은 감태는 비닐봉지에 넣어 냉동실에 보관하면 바다맛이 사라지지 않는다.

요즘은 망운 감태도 구하기가 쉽지 않다. 감태를 기르는 바다가 오염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가끔 택배로 앞에서 열거한 고향의 먹을거리들을 부쳐주시면서 꼭 당부 말씀을 빠뜨리지 않으신다.

“느그 마누라가 해준 반찬이 맛있다고 함스러 먹어라, 잉. 안 그러면 못써야."

무슨 말씀인지 알아듣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머니가 해주신 고향맛이 좋은 것을 어떡하랴. 일평생 전라도맛을 보고 사는 사람은 그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봄에는 산에 들에 한 걸음마다 나물이 지천이다. 하늘과 땅, 사람의 손맛으로 빚어낸 전라도 맛은 장수비결에 넣어야 한다.

구십이 넘으신 어머니가 그 산 증인이다. 나이가 들어가니 나도 모르게 자꾸만 더 고향의 맛을 찾게 된다. 3,4월 봄에는 논두렁에서 자운영을 캐다가 된장에 무쳐먹으면 그 맛과 향이 참 좋았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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