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생각나지 않을 때
말이 생각나지 않을 때
  • 문틈 시인
  • 승인 2021.02.25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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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면 대개는 기억력이 흐려지기 마련이다. 친했던 중고등학교 동창생들의 이름도 머리 속에서 가물거린다. 나로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어릴 적 쓰던 말들이 잘 생각나지 않을 때다. 이 생전 기억력이 좋다는 말을 듣고 살아왔는데 뇌세포도 기능이 떨어져 때로 말들이 생각나지 않는다.

나이듦은 내게도 어쩔 수가 없나보다. 생각날 듯 말 듯 머리를 쥐어짜도 생각나지 않아 아직도 애닳고 있는 말들이 있다. 수년간 지인들을 통해 그 말을 알아내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때마다 울고 싶을 정도로 막막하기도 했다. 마치 귀중한 보석이라도 잃어버린 것처럼. 아니 그보다 더한 상실의 감정이라고 해야 할까.

인생이란 추억의 집합인데 잃어버린 말 때문에 아름다운 한 시절을 놓쳐버린 것 같아 안타깝고 슬프기조차 하다. 수년째 떠올리려 애써도 여직 찾지 못한 말들, 그것들 중 몇 개 예를 들면 이런 것이 있다.

집 앞에 논이 있었는데 봄이 와서 쟁기질을 할 때 쟁기날에 논흙이 뒤집어지면 그 반질한 흙덩이에 작은 구근이 쟁기날에 베여 허옇게 박혀 있다. 우리는 쟁기질하는 일꾼 뒤를 따라가며 흙에 박힌 그 작은 구근을 파내어 먹곤 했다. 생고구마 맛 같은, 생밤 맛 같은 그 맛을 캐내려 쟁기날에 넘어가는 흙고랑을 뒤쫓아갔다.

근데 그 작은 구근의 이름이 암만해도 생각나지 않는다. 틈만 나면 그 이름을 찾아내려고 사람들에게 탐문해보았으나 다들 모른다고 했다. 결국 알아내지 못했다. 그 이름을 알아내면 그 시절의 모든 정경이 살아나고 나는 무척 행복해질 것 같다. 그러다가 무안에 사는 내 동생에게 물었지만 자기는 그런 경험이 없어 모른다 한다. 그래도 농사짓는 이웃 사람들에게 좀 알아봐달라고 당부했다.

들에 벼가 익어갈 무렵엔 벼 모가지에 참새들이 달라붙어 이삭을 축낸다. 농사꾼들은 허수아비, 빈 깡통 들을 논바닥에 세워놓고 새들을 쫓는다. 그것 말고도 처녀 아이들 머릿단처럼 짚으로 길게 꼬아가지고 논에 나가 그 짚으로 꼰 것을 공중에 한번 휘저어 휙 내치면 하늘을 찢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난다. 새들이 그 소리에 놀라 일제히 논에서 날아오른다.

그 짚으로 꼰 것을 무엇이라고 이름했던가. 그 말을 알면 지금 내 귀에 먼 옛날의 그 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그 날카로운 소리를 내는 것은 특별한 재주가 있어야 한다. 머리 위 공중을 몇 바퀴 돌리다가 어느 참에서 갑자기 잡아 내치는 능숙한 솜씨를 발휘해야 날카로운 소리가 공중을 진동하는 것이다.

어느 해 어머니를 뵈러갔을 때 아파트 동 입구 녹지대에 하얀 쌀 부스러기 모양의 흰꽃이 핀 키 작은 풀이 있었는데 동그란 검은 열매들이 열려 있었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갑자기 온몸이 행복감으로 전율했다. 너 여기 살아 있었구나! 어릴 적에 이 풀 열매를 따서 먹었었다. 약간 달짝지근하기도 하고 부드럽기도 한 맛이 입에 기쁨을 주었었다.

그런데 이 풀 열매 이름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께 물었다. 먹때깔이라고 일러주셨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먹대깔이란 이름이 기억 속에서 되살려지지 않는다. 혹시 우리들끼리는 다른 이름으로 불렀던 것일까. 사전을 뒤적이고 나서야 정리가 되었다.

때깔은 꽈리의 전라도말인데 작은 방울토마토처럼 생겼고 받침잎들이 에워싸고 있는 모양을 한 시골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주황색 풀 열매다. 먹대깔은 이 때깔에 견주기도 민망한 풀 열매로 동그랗기는 하지만 크기가 무척 작다. 때깔에 견주어 검은색을 하고 있으니 먹때깔이라 부르는 듯하다.

이밖에도 헤아리자면 잃어버린 말들이 많다. 살면서 우리는 귀중한 말들을 하나하나 잃어버리며 사는 것 같다. 아름다운, 정다운, 사랑스러운 말들을 잃어간다는 것은 늙는 것만큼이나 서러운 일이다. 나는 이런 맥락에서 어릴 적 어머니와 고향이 가르쳐준 전라도 탯말(사투리)을 사랑한다. 그리고 애써 잊지 않으려고 한다. 일부러 전라도 말을 쓰려고 한다.

전라도 말을 들으면 내 영혼이 위로를 받는 것 같고, 내가 티 없이 순수하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는 것 같다. 사람이 죽으면 하늘에 간다는데 그곳에서 하는 말이 있다면 아마도 자기가 어릴 때 배웠던 어머니와 고향이 가르쳐준 그 말이 아닐까.

앞에서 내가 잃어버린 말들 중에 예를 든 말들은 하나는 옹구밥이고, 참새쫓는 것은 뙈기라 한다고 동생이 일러주었다. 그런데 내 기억은 옹구밥이라고 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기억에서 잊는다는 것과 잃어버린다는 것은 다른가 보다. 잃어버린 말들아, 돌아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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