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부패로 망하다 (14) - 성균관 유생들, 최익현 상소와 관련하여 집단 시위하다.
조선, 부패로 망하다 (14) - 성균관 유생들, 최익현 상소와 관련하여 집단 시위하다.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21.02.22 09: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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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3년 10월 28일에 성균관 유생들이 최익현의 상소와 관련하여 집단시위를 했다.

경복궁  곤녕합 (왕비의 침전)
경복궁 곤녕합 (왕비의 침전)

“최익현 상소의 내용 가운데 이륜두상(彝倫斁喪) 즉 윤리와 의리가 썩어 무너지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상소는 통탄할 일입니다. 이는 단지 신들만 통분한 생각을 품은 것이 아니라 온 조정 사람들이 함께 부끄럽게 여기는 바입니다.”

이러자 고종은 성균관 유생들의 집단 식사 거부는 극히 온당치 못하니, 즉시 깨우쳐 주라 하였다.

10월 29일에 진강(進講)이 끝나자 고종은 "어제 성균관 유생들이 집단 시위한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라고 말했다. 이러자 강관(講官) 박규수는 "예전에도 성균관 유생들이 간혹 이런 일을 하였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날 오후에 성균관에서 성상의 하교대로 유생들을 불러서 성균관에 들어갈 것을 권했지만 끝내 거부했다고 보고했다. 고종은 "다시 엄하게 효유(曉諭)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성균관 유생들이 집단시위를 계속하자, 고종은 시위를 발론(發論)한 사람과 주모자 중 우두머리를 형조에 이송하여 엄하게 형벌을 가하고 먼 곳에 유배보내라고 명하였다.

그런데 11월 1일에 형조 판서 조병창이 상소를 올렸다.

"신이 형조 판서에 제수되었으니, 성균관 유생들을 형배(刑配)하는 일을 응당 집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성균관에서 인재로 키우는 사람들이고 문묘(文廟)를 지키는 사람들이니, 협잡하는 무리로 몰아 갑자기 형벌을 가하여 귀양 보내는 형벌을 적용해서는 안 될 것이니, 널리 포용하는 도량과 선비의 기풍을 조장하는 뜻에 부족함이 있을 듯합니다.

신은 법을 관장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으로서 침묵을 지킬 수 없기에 외람되게 의견을 아뢰니, 다시 더 참작하여 처분을 내리소서.”

이러자 고종은 매우 화가 나서 "지금 형조 판서 조병창의 상소문을 보았다. 협잡한 무리를 옳다고 여기면 나의 처분은 옳지 않다고 여기는 것인가? 매우 놀라운 일이다. 삭탈관직의 형전을 시행하라."고 전교했다.

이 날 성균관 유생들이 집단시위와 관련하여 아뢰었다.

“전번에 집단시위한 유생들은 최익현의 상소 내용에서 ‘이륜두상(彝倫斁喪)’ 글자를 가지고 품고 있는 생각을 여러 번에 걸쳐 올렸다가 형배(刑配)의 법전을 받들기까지 하였으며 뒤이어 엄한 비답이 융중(隆重)하였습니다. 이에 신들이 다시 의견을 아뢰는 것이 극히 외람된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저 상소에는 무슨 지적할 문제가 있기에 말을 그토록 어려움 없이 하여 한 시대를 두상(斁喪)의 죄에 몰아넣는 것입니까? 신들이 다만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고 머뭇거리면서 침묵만 지킨다면 나라에서 오백 년을 두고 길러온 선비들의 기풍은 신들에 이르러 땅을 쓴 듯이 없어질 것입니다. 이에 감히 피력하여 전하를 번거롭게 하니, 더욱 황송함을 이길 수 없습니다. 사처(私處)에 물러가서 공손히 처분을 기다리겠습니다."

이러자 고종이 전교하였다.

"임금의 명령을 그와 같이 어기니, 어찌 이런 사습(士習)이 있을 수 있는가? 속히 분명하게 타일러 들어가도록 권하라."

11월 2일에 성균관 유생들이 최익현의 상소문 중 윤리와 의리가 파괴되었다는 말을 해명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성균관에서 아뢰었다.

"신이 성상의 분부대로 여러 유생들을 불러놓고 성지(聖旨)를 전하고 성균관에 들어가라고 권하니, 유생들은 ‘최익현은 상소에서 ‘이륜두상’ 네 글자를 거리낌 없이 썼습니다. 만일 통렬히 해명하지 않는다면 오늘의 세상은 틀림없이 뒷날 사람들의 의혹을 일으키는 단서가 됨을 면치 못하게 될 것입니다. 반드시 그의 죄를 성토하고 진상을 밝혀낸 다음에야 온 조정의 수치를 씻을 수 있고 많은 선비들의 울분을 조금이나마 풀어줄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에 고종이 전교하였다.

"여러 번 신칙하였는데도 그와 같이 완강하니, 어찌 이렇단 말인가?

몹시 놀라운 일이다." (고종실록 1873년 11월 2일)

고종은 성균관 유생들의 집단시위로 골치가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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